「여름나기」의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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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호박잎에 듣는 굵은 빗방을 소리로부터 시작되는 소나기가 있어 우리의 한여름은 아무리 더워도 견딜만 했고,잘 익은 제철의 과일 맛으로 여름 저녁 툇마루나 마당은 훈훈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비닐하우스 재배로 과일은 제맛이 아니고 황소 잔등을 두고 피한다는 여름 소나기조차 없어져버렸다.
환경변화 탓일까.
텃밭에는 손가락만한 고추가 달리고 노오란 오이며 자주빛 가지들이 제법 모양을 갖추는 한여름,손수 가꾼 사각거리는 열무김치에 매운 풋고추를 썰어넣은 오이·가지냉국은 자칫 잃기쉬운 입맛을 돋워주곤 했다.
이제 속성 재배된 채소가 올려진 테이블의 의자에 앉으면 어린 시절의 여름 잔광이 아련하기만 하다.
더위는 합죽선으로 몰아내야 하고 삼베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으로 식혀야 하는데 에어컨이며 선풍기의 윙윙거리는 기계음으로 안락함을누린 대서야 그게 어디 제 멋이겠는가.
한가함과 나른함, 그리고 조금은 게으름이 통하는 여름의 편안함을 이제 어디서 맛보아야 할지 ….
장마철은 또 장마철대로 멋이 있었다.
이틀 사흘 줄기차게 내리던 비도 하루쯤 잠깐씩 들어주어 더렵혀진 옷가지를 빨아 말릴수 있게 하고 텃밭의 푸성귀가 생기를 차려 먹거리가 귀하지 않게 하였으며 터진둑도 손보고, 이웃들의 밝은 얼굴도 대할 수 있게 했다.
큰 물이 져 사태가 나고 축담이 무너진다 해도 지금처럼 끔찍한 인재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사람과 자연이 잘 어우러져 사는 이치가 그르쳐 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큰 재앙을 하늘의 뜻으로 새기려 했음이 조금은 우직하고 미련스럽다 하더라도 그때 우리는 인간적 배신을 더러워하고 전심을 경원할줄도 알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하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배신을 예사로하며 제 재주만 믿고 눈앞만가리고 피하면 그만 이라눈간특한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여름인들 제대로 여름다워지겠는가.
지금 우리의 땅과 하늘을 메우고 있는 더러운 기류들,정치적·경제적·인간적 부정이, 그 열기가 너무나 드세어 자연은 예같지 않게 변해 버렸다. 김중하<부산대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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