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23. 이병철 회장 <6>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이병철(左) 삼성 회장이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라운드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중앙포토]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자녀들 중 나와 가장 가까웠던 분은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다.

이명희 회장은 붙임성이 있었다. 골프가문의 딸답게 스윙도 멋졌고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큰언니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점잖으면서 말수가 적었던 데 비해 이명희 회장은 외향적이고 성격이 급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골프가 뜻대로 안 되면 화도 내고 어떤 때는 토라지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래서 나와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다.

틈만 나면 "한 프로 예, 뭐 도와줄 것 없어 예?"라고 물어보며 코치인 나를 잘 챙겨줬다. 내가 안양컨트리클럽을 떠난 뒤에도 이명희 회장은 틈틈이 사람을 보내 양복표.설탕 등을 보냈다.

나는 1990년대 초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전국여성부녀회 초청으로 골프를 주제로 강연한 적이 있다. 이병철 회장의 골프 일화를 포함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강연이 끝난 뒤 이명희 회장이 불쑥 나타나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내게서 골프를 배우던 옛 시절과 함께 아버지가 생각난 듯 이 회장은 "수고했다"며 호텔 현관까지 나와 배웅해줬다. 그때가 이 회장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삼호방직 집안의 며느리가 된 이 회장은 결혼 뒤 자유컨트리클럽의 주인이 됐다. 신세계여자오픈골프대회를 개최하는 등 이 회장의 '골프사랑'은 남다르다.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안양CC 헤드프로 생활은 33개월 만에 끝났다. 69년에 일어난 한 사건이 발단이 됐다.

이병철 회장 가족과 함께 골프를 치며 월급도 많이 받고, 프로숍.연습장 운영까지 하는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흔 살도 안 된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샘을 낸 것 같았다.

안양CC 지배인이 자주 바뀌던 당시 이병철 회장의 친구 아들인 김씨가 지배인 대리로 있었다. 이 회장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친구의 가족을 돌봐줬다. 그의 아들을 공부시켜 중앙개발에서 일하게 했다. 이 회장이 "네가 골프를 좀 가르쳐줘라"며 부탁해 나는 김씨와 1년 가까이 잘 지냈다.

그런데 내가 외국 대회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월급날이었다. 월급봉투를 받은 나는 공제 항목에 전혀 알 수 없는 외상값이 들어 있어 지배인과 총무과장에게 "이게 뭐냐"고 따졌다.

평소 말을 놓고 지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지배인이 대뜸 "그럼 없는 걸 있다고 하나"며 나를 몰아세웠다. 말다툼 도중 그가 "프로면 다냐"고 한 말에 나는 그만 이성을 잃었다. "너 말 다 했어?"라는 고함과 함께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딱 한 방의 주먹에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에게 가벼운 간질병 증세가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나중에 화해했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직원들의 보고로 이병철 회장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됐다.

한장상 KPGA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