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의 전설 간직한 자연의 추억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SUNDAY

인공의 힘이 아무리 장대한들 이 자연의 위대함에 견줄 수 있으랴. 경외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대자연 속에서 겸허함을 다시 배운다.

‘피오르 크루즈’의 절정이라 불리는 가이랑거 피오르를 바라보는 승객들.


강인가 바다인가, 아니면 호수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래 피오르(fjord)다. 그것도 그냥 피오르가 아니라 노르웨이 피오르다. 암녹색이다. 아니 검은색이다. 그 물 위로 솟은 절벽이 족히 200m는 돼 보인다. 머리에 눈을 인 절벽과 산은 다시 그 깊은 물에 안긴다.

그곳엔 누가 살고 있을까. 한번도 바깥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바다 친구들. 그중엔 어류와 파충류, 양서류의 중간쯤 되는 그런 녀석도 있으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쿵 뛴다. 혹시 이번 여행에서 그런 친구를 만나는 행운을 잡을 수는 없을까.
몇 억년 전 빙하기에 지축을 흔드는 줄달음이 있었다. 두께가 1㎞에 이르는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슬쩍 허리를 뒤틀며 지나갔다. 고막을 찢는 굉음 속에서 U자형 계곡이 잉태됐다. 그리고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쌓였다. 세월의 무게에 마침내 얼음덩어리가 녹았고, U자형 계곡엔 대서양 바닷물이 가득 채워졌다. 이게 노르웨이 피오르다. 인공의 힘이 아무리 장대한들 이 자연의 위대함에 견줄 수 있으랴. 경외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대자연 속에서 겸허함을 다시 배운다.

작곡가 그리그의 고향

500여 명의 손님을 실은 유람선은 피오르 물길을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힘이 안 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날 오후 8시, 이 나라 제2의 도시 베르겐을 출발, 깜깜한 밤길을 11시간이나 달려왔으니 쉴 때도 됐다. 어디서라도 못 쉴까마는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 한다.

유람선은 초승달을 닮은 아늑한 만으로 찾아든다. 겨우 고개만 내민 작은 바위섬의 꼬마 등대가 “이 정도면 항구라고 할 만하지요”라고 속삭인다. 산밑 초지엔 풀들이 파랗다. 목장 안에 말 몇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낙원이라 이름 붙여도 무방하리라.
한 20분쯤 쉬었을까. 고동이 울리며 배는 다시 꿈틀댄다. 이제부턴 머리에 눈 모자를 쓴 산들이 자주 나타난다. 만년설은 아니라고 한다. 여름이면 거의 녹는다. 대서양 난류와 편서풍 때문이다. 그래서 위도가 높은 것에 비하면 겨울에도 생각만큼 춥지 않다고 한다.

2. 동화 속 작은 마을처럼 보이는 올레순 도시 풍광. 3. 머리에 눈을 인 절벽을 망원경으로 살피는 관광객들. 4. 유람선에서 바라본 북해의 일몰.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물을 좋아한다. 모든 집은 물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지어져 있다. 피오르 양안(兩岸)으로 줄지어, 때로는 띄엄띄엄 서 있는 집들이 액자 속 그림 같다. 누가 살까.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일렁이는 물결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우울해진다는데…. 쓸데없는 걱정일까.

동화 같은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올레순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노르웨이 집은 목조지만 이곳은 석조다. 100여 년 전 화재로 도시가 몽땅 불탔다. 그 뒤 이웃 나라에서 돌을 수입해와 형형색색의 작품을 만든 것이 이 도시다. 선장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지금부터 더 죽이는 경치가 펼쳐집니다. 오후 2시쯤 여러분은 절정을 목격할 것입니다.” 뭘 어떻게 더 죽인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여기부터 그 유명한 가이랑거 피오르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한다. 안내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장관이 펼쳐진다. 수 억년 전 불어닥쳤던 그 눈발인가. 그러나 공중을 몇 번 솟구치면서 빗방울이 된다. 배를 타기 전 접했던 베르겐의 그 음울한 풍경이 생각난다.

이 나라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 그가 살았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방인을 반기던 짙은 안개와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린 시절 꽤나 자주 들었던 ‘솔베이지의 노래’가 여기서 지어졌다는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유람선 위의 별천지 인생

산등성이에서 눈 녹은 물들이 하얀 길을 그리며 추락한다. 주변의 모든 산에 실개천 같은 선이 그어져 있다. 꼭 스키장 슬로프 안내도 같다. 좁아지는 물길을 따라 배는 계속 흘러간다. 깎아지른 절벽이 코앞에 다가온다. 점잖기만 하던 유람선이 갑자기 꽥 고동소리를 지른다. 더 갈 데가 없다는 외침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가이랑거 피오르 가장 안쪽에 당도한 것이다. 거대한 바위산의 설경이 압권이다. 250명쯤 산다는 마을이 있고, 호텔과 가게도 보인다. 일부 손님은 여기서 손을 흔들며 내린다.

가이랑거를 다시 돌아 나온다. 9층으로 된 유람선 맨 꼭대기엔 사우나가 있다. 그 안에서 벌거벗고 맥주 한잔을 마시며 발 아래 눈 쌓인 계곡을 굽어보는 호사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몸이 더워지면 수영복을 입고 갑판으로 나온다. 거기엔 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온탕이 있다. 청정도 120%의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한다. 별천지가 따로 없다.

수심은 보통 수백m에서 깊은 곳은 수천m에 이른다. 폭이 좁아 유람선이 다닐 수 없는 협곡엔 생업을 위한 손길이 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숨소리가 거칠게 느껴진다. 유람선 위의 인생도 있지만 누군가는 오늘의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 유람선 위에서 와인잔을 기울이는 인생도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투입했던가. 승객들의 평균 나이가 60대 중반은 돼 보인다. 오랜 성상을 살면서 이런 호사가 처음인 사람도 많으리라. 그들이 아무리 잘사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왔다고 해도.

선미에 앉아 배가 만든 물길을 바라본다. 미끄러지듯 움직이지만 뒤를 보면 흔적이 요란하다. 거대한 금속덩어리가 온 힘을 쏟아 만든 물길도 바로 사라진다. 자취를 남기려고 애쓰는 인간들의 모습이 덧없게 느껴진다.

---
TRAVEL TIP

피오르 유람선

대부분 베르겐에서 출발한다. 북단인 러시아 접경의 키르키네스까지 올라가는 데 엿새가 걸리고, 다시 그 길을 내려오는 데 닷새가 필요하다. 11박12일간 35개 항구를 들른다. 손님들은 중간 기착지에서 잠깐 내릴 수도, 아주 내릴 수도 있다. 가격은 몇 박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가이랑거 관광만 한다면 베르겐에서 올레순까지 1박2일이면 된다. 이때 승선료는 약 17만원, 선실(보통급)은 1박에 10만원 선. 식사는 아침 2만원, 점심 4만6000원, 저녁 5만4000원으로 계산한다.

노르웨이 가는 길

한국에서 가는 직항편은 없다. 런던ㆍ암스테르담 등 유럽 대도시에서 한번 바꿔 타야 한다. 갈아타는 시간을 빼고 비행시간만 13시간쯤 걸린다. 노르웨이 여행의 백미인 백야(白夜)를 즐기려면 한여름을 택해야 한다. 물가가 무척 비싸다는 것이 큰 흠이다. 500㎖ 물 한 병이 4000원,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 메뉴가 1만5000원쯤 한다.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