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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부럽지 않은 폼나는 출장 파트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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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31면

나는 숀 코너리 주연의 ‘007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다. 너글너글한 매력의 숀 코너리, 그만큼 제임스 본드에 어울리는 배역은 없다. 상상초월, 신출귀몰하는 제임스 본드의 활약상을 담은 영화에서 재미는 기본이다. ‘쭉쭉빵빵한’ 본드 걸과 놀아나는 남자의 능력이 내심 더 부러웠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샘소나이트 하드 케이스

영화에 빠지지 않는 소품 하나, 바로 007 가방이다. 위기상황을 반전시키는 온갖 무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방. 그것만 지니고 있으면 007처럼 될 것 같은 착각을 해보지 않은 남자는 없다. 선망하던 007 가방은 어느 때부터인가 뒷거래의 상징으로 더 친숙하다.

직장생활 시절, 잦은 출장으로 여러 곳을 누볐다. 출장의 기본 장비는 가방이다. 넘쳐도 모자라도 안 된다. 들어있는 내용물이 삶의 방법이다. 007의 가방에 든 첨단장비 대신 내 가방은 먹고살아야 하는 물건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 다를 뿐. 그래도 기왕이면 제임스 본드 기분을 내고 싶다.

물건은 넘치지만 정작 쓸 만한 것은 적다. 이럴 땐 신뢰의 브랜드를 떠올려야 한다. 영화에서 보았던 가죽 가방은 무겁고 실용성 측면에서 여러 문제를 지닌다. 게다가 캐주얼 스타일인 나의 기본 패션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몇 개의 가방을 비교한 끝에 선택한 것은 단연 샘소나이트다.

신화의 주인공 삼손에게서 이름을 따왔다는 미국의 샘소나이트 가방. 어원의 연상만큼 단순한 선의 우직하고 든든한 디자인, 황당한 금액의 유럽 명품에 비하면 헐값이라는 생각을 주는 합리적 가격, 여기에 견고함까지 갖춘 실용성 높은 브랜드다.

글라스 파이버를 함침시킨 FRP 소재의 샘소나이트 하드 케이스는 첫눈에 들어왔다. 플라스틱 계열의 소재가 주는 경박함을 풍기지 않는다. 짙은 회색의 메탈릭 컬러가 007 가방의 이미지를 그대로 계승하는 듯한 이미지도 좋다.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손잡이 디자인이다. 날렵한 유선형의 선은 가방의 스카이라인과 매끄럽게 이어진다. 손에 착 감기는 안쪽의 촉감도 일품이다.

이후 샘소나이트 하드 케이스는 단기 출장의 파트너로 활약했다. 필요한 서류와 노트북을 넣고 간단한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더해도 공간은 여유가 있다. 자질구레한 물건은 사이사이에 구겨넣으면 된다.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담긴다. 하드 케이스의 장점은 많은 짐을 넣어도 옆면이 불룩해지지 않는다. 007의 폼을 잡기 위해선 꼭 필요한 부분이다.

1990년 초반에 산 샘소나이트 하드 케이스는 여전히 현역이다.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다. 이동의 횟수만큼 스쳤던 상처가 남고 강아지 코 같던 광택이 죽었다. 세월에 맞서 그대로 있다면 외려 뺀질한 천박함으로 정떨어졌을지 모른다. 샘소나이트 하드 케이스와 함께한 거리는 몇 만 km를 넘겼다. 물건에 시간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애정을 말하지 못한다. 애정은 함께한 시간이 쌓인 추억의 또 다른 모습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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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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