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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의 TV 뒤집기] “김연아, 그녀도 사람이군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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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월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 선수가 얼음판에 넘어진 순간, 경기를 중계하던 영국 유로 스포츠 캐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지른 뒤 이렇게 말했다. “천상의 연기를 펼치는 김연아의 우아한 자태는 말 그대로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했고, 우리는 요정의 출현에 꿈을 꾸는 듯한 환희를 느꼈다. 그런데 빙판의 요정이 결국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란 걸, 우리는 얼마나 존중할 수 있을까.”

스케이트 복을 벗고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선 소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인터넷에 널리 퍼진 동영상에서 소녀는 고운 목소리로 노래도 잘했다. 미니홈피에서는 당돌한 말투로 사람들의 관심에 답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며 한마디씩들 날린다. “연습은 언제 하고.” “돈 벌려고 그런다.” “정말 실망했다.”

지난주 KBS ‘단박 인터뷰‘에서 김연아는 “훈련시간도 아닌 남는 시간에 그런 걸 한 게 왜 잘못이죠?”라며 의아해했다. 그는 또 “(라이벌인) 아사다 마오를 이기는 데는 관심없다. 마오를 이기려고 스케이트를 타는 것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얼음 위의 요정이 아닌, 세상 속의 사람으로서도 소녀는 여전히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딱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실망스럽다”는 반응은 시들지 않는다.

과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은 그랬다. “불꽃같은 투혼을 불살라 금메달을 따겠습니다.” 세상일을 등진 채 기계처럼 훈련하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기대를 부풀린다. 그 결과,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때 그들은 고개를 떨구고 우리들은 안타까워했다. 그런 스포츠 스타들에게 익숙해진 과거의 시선으로 바라본 김연아의 당돌함은 아직은 어색할 수 있다. 말로만 “대한민국의 딸”이라고 할 게 아니라 진정 부모의 심정에서 그를 본다면 어떨까. 자식이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특출한 기예를 가졌다고 해서, 잠자는 시간 말고는 하루 온종일 그 일에만 매달리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 부모의 자세일까. 호주의 수영 천재로 금메달만 5개를 따냈다가 지난겨울 돌연 은퇴를 선언한 이언 소프의 뒤에는 스포츠 심리학자 데이드레 앤더슨 여사의 권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 최고의 자리는 고독하고 불안한 곳”이라며 스포츠 스타들이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한 번뿐인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다.”

김연아의 당당한 발언과 행동은 행복하게 살 권리를 누리는 인간의 모습이다. 팬의 입장에서 보면, 옷의 아름다움을 보고 노래의 즐거움을 느끼는 경험이 그의 스케이트 연기를 더욱 풍부한 표현력과 감수성으로 풍성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자식을 가진 부모로서 나는 심지어 김연아가 예쁜 옷의 아름다움에 빠져 패션모델로의 변신을 돌연 선언하거나, 어느 날 가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피땀을 흘리는 기계 같은 모습의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대한민국의 딸’을 더 따듯하게 보듬어주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행복하게 하는 해피메이커로 그녀가 4위에 뽑혔다고 하던가? 대한민국을 행복하게 했던 김연아에게도 행복해질 권리를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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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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