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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록에 실린 로코코 왕녀의 역사 비틀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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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12면

역사는 역사가들이 ‘지어낸’ 거대담론. 그러므로 그 고정된 개념을 깨고 제멋대로 역사를 해체하면 그것 자체가 전복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해체의 대상이 근대의 상징인 프랑스 대혁명과 관계있다면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로 멜로 드라마에서 뛰어난 솜씨를 선보였던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이번에는 시대극에 도전했다. 프랑스혁명군에 의해 기요틴에 참수당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 드라마가 그것이다. 역사에 따르면 사치와 허영으로 악명 높은 왕녀가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속에서는 아주 평범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로 그려진다. 게다가 그녀에 대한 오명은 역사가들의 편견의 결과라고 슬쩍 변호까지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전통을 찬양하는 관객들에겐 불쾌감을, 전복을 즐기는 관객들에겐 즐거운 미소를 선사하는 자기 입장이 분명한 작품이다.
 
고정관념을 뒤집는 장난기와 균열
내용만 그런 게 아니다. 고정관념의 뒤집기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들려오는 록 넘버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어(Natural’s Not in It)’에서부터 시작한다. 모차르트 혹은 왕녀가 직접 후원했던 글루크의 고전음악이나 어울릴 것 같은 로코코 시대의 드라마에 느닷없이 영국 인디밴드 ‘갱 오브 포’의 펑크록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

‘대부’의 감독 코폴라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도 영국의 1970, 80년대 펑크록에 대한 자신의 깊은 애정을 표현했는데, 시대극을 만들면서도 여전히 반항적인 청년의 음악인 펑크록을 대거 끌어온다. 영화는 한국 드라마 ‘궁’ 같은 판타지도 아니고,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을 정면으로 다루는 시대극이다. 로코코 시절의 배경음악을 펑크록으로 바꿔놓은 장난기, 이런 균열이 바로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매력이자 동시에 불편함을 제공하는 요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공주로, 프랑스와의 화해를 위한 정략결혼에 희생된 인물로 나온다. 이는 영화의 원작가인 영국인 소설가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시각에 따른 것이다. 200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해럴드 핀터의 아내인 프레이저는 역사적인 인물들에 관한 전기소설 작가로 이름이 높은데, 공적인 역사보다는 사적인 일상에 더욱 주목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룬 소설에도 혁명기의 사회적 분위기는 뒤로 밀려 있다. 14세의 앳된 신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방이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진 이방인 신세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주인공 빌 머리와 비슷한 역할이다. 프랑스 궁전의 모든 사람은 그녀를 외부의 침입자, 또는 오스트리아의 스파이쯤으로 여기지 미래의 왕녀로 대접하지 않는다. 어린 남편 루이 16세는 적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했던지 아내를 맞이하고도 전혀 그녀와 관계를 맺지 못할 정도다. 넓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녀는 외톨이가 된다.

‘갱 오브 포’의 노래대로 그녀에게 이제 “심심함의 문제는 쾌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된다. 그녀는 비싼 옷과 구두를 사들이고, 헤어스타일을 이리저리 바꾸고, 별의별 케이크를 다 만드는 데 돈을 펑펑 쓰며 무료함을 달랜다. 역사에서 그녀가 악명을 얻는 순간인 것이다. 궁전의 여성들과 함께 지나치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온갖 달콤한 과자를 먹으며 눈부신 옷들을 구경할 때, 영국 펑크록 밴드 ‘바우 와우 와우’의 ‘나는 캔디를 원해(I Want Candy)’가 연주되는데, 이럴 때면 시대극의 인물들은 록 콘서트에 앉아 있는 소녀들과 별로 구별되지 않을 정도다. 키치적 요소는 전통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들기에 아주 효과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역사 전달의 전통방식에 대한 반항
시대착오적인 음악 삽입의 절정은 왕녀가 동료들과 함께 가면무도회에 참석할 때다. 홀을 가득 메운 귀족들이 로코코풍의 화려한 옷을 입고 역시 80년대 영국 펑크록 밴드 ‘수지 앤 밴시스’의 ‘홍콩 가든(Hongkong Garden)’에 맞춰 춤을 춘다. 가면무도회는 18세기의 껍데기만 빌렸을 뿐이지 그 실상은 여느 현대 도시의 나이트클럽 모습과 다를 게 없다. 홀 가득히 펑크록의 비트가 울려 퍼지고 귀족들은 드레스를 입은 채 몸을 흔들어댄다. 웃음이 터져나오는 순간이기도 하고, 어리둥절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역사와 시간의 무게는 나이트클럽 같은 장소에서 펑크록에 의해 간단히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분열적인 이 영화는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받았는데, 그때도 작품에 대한 지지와 비판의 소리가 양분됐었다. 특히 프랑스혁명을 희화화하는 내용 때문에 현지 관객들의 불만이 높았다. 영화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름다운 처녀이자 현명한 아내이며 헌신적인 어머니일 뿐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악랄한 왕족의 여주인이 아닌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배고픈 프랑스 농부들의 원성을 듣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나 먹지”라고 말할 철면피 왕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프랑스혁명의 역사성은 2001년 에릭 로메르의 ‘영국 여인과 공작’에 의해 이미 도전받은 적이 있다. 프랑스의 거장인 로메르는 혁명을 영국 귀족의 눈으로 바라보며, 혁명군을 폭도들로 묘사했던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는 혁명군의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어쩌면 더욱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는데, 스크린의 외부에 존재하며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고통을 주는 폭력적인 타자로 제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는 반동적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역사를 전달하는 전통적 방식에 대한 반항이 새롭기 때문이다. 펑크로커 같은 코폴라 감독이 들려주는 반동의 로코코 왕녀 이야기, 이런 극단적인 분열이 역사적인 담론 자체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 펑크록으로 새로 연주하면 전부 거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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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씨는 미술과 몸을 섞은 영화 이야기『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로 이름난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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