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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읽다』에서 멀어진 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92년 여름, 우리 문학은 우울하다. 확실한 전망을 상실한 채 부황하게 떠들고 있는 작금의 일상사와 닮은꼴의 풍경이다. 마치 기계적으로 반영하려는 것만 같다. 대체로 요즘 우리 문학은 「쓰다」와 「읽다」라는 문학의 기본동사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다. 기본동사에서 변형된 사이비 혹은 아류동사들에 휘둘리며 그저 부유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문학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으며, 문학 역시 소외되고 있긴 마찬가지다.
먼저 「쓰다」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글쓰는 주체의 위기와 혼돈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 문제는 간단치 않다. 글쓰는 사람을 둘러싼 일련의 사회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한 음모가 있었다. 그들의 환경적 조건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환경을 십분 고려한다 하더라도 작가에게 무한의 면책특권을 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기국면일수록 작가는 위기관리능력으로 자기의 진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쓰다」라는 동사의 내적 필연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턱없이 비문법적 문장들을 나열해 놓고 해체의 전략이라고 우기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시인이라 부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탈문법에도 문법이 있는 것이고 해체에도 그에 따르는 문법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경박한 자기경험을 근거없이 나열하거나, 독서를 포함한 문화적인 경험을 자기와의 대화없이 늘어놓거나, 상업적 옐로이즘에 빠져들면서도 「이것은 포스트모던한 소설」이라 강변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아도 좋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책임하고 안이하며 자기배설적인 이들의 「만능 면죄부」일 수는 없는 까닭이다.
문제는 자기반성과 자기심화를 거친 자기인식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쓰다」라는 동사의 내적 필연성에 다가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현실과 인간을 외면해선 안된다. 그것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맹렬하게 사랑해야 한다. 그 애증속에서 기존의 주체와 대상을 모두 진지하게 부수고,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혁신없는 문학은 재미도, 의미도, 독자도 없다. 나아가 인간해방의 참의미도 알지 못한다.
이와 관련, 「읽다」의 문제는 무엇인가. 읽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혼돈의 숲을 가로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로지르면서 보고, 가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읽는 주체의 「눈」이 밝아야 한다. 물론 그 눈은 반성하는 눈이어야 한다. 독선적이고 재단적인 눈은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읽는 대상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주체의 눈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눈이 많다. 대상에 미혹되거나, 자기에 매몰되는 눈들이 있어 문학의 실상을 흐리고 있다. 오독을 낳고 있다. 이점 작가·비평가·저널리스트·독자 모두 반성해야 한다.
요즘 문단일각에서 있었던 몇몇 논쟁성 사건들에서도 우리는 현실과 문학작품에 대한 오독의 사례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 오독에 비해 「오독의 사회화」는 심각한 편이다. 그것은 「제 살 뜯어먹기」 식의 오류에 그치는 게 아니다. 잘못 던져진 폭탄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부정적 파괴력은 끝내 진정한 문학혼을 죽일 수도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독의 사회화」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문학작품 광고를 통해 오독의 사회화를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명백한 잘못이다. 허위광고·과장광고는 지양돼야 한다. 이런 상황은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선택의 곤란을 겪게 한다. 하지만 이럴때일수록 정확한 눈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옥석을 가리지 못한 채 부질없는 이야기 속에 자신의 의식을 방매시켜 버리는 경향은 없어져야 한다. 나아가 진정한 문학생산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의미있는 「문학 소비자운동」을 벌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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