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라운지] "배심원 감동시켜라" 불꽃 설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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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직원 4명과 기자들이 배심원으로 참가한 모의재판이 16일 용인 법무연수원에서 열렸다. 살인교사 혐의 재판에서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증거품인 피묻은 양복을 보여 주고 있다. 김태성 기자

"여기 피가 묻어 있습니다. 보이시죠. 유전자 검사 결과 살인자의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16일 경기도 용인 법무연수원에서 열린 배심제 모의 재판. 살인 교사 사건의 공소 사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윤동환 검사가 증거물을 배심원 앞에 꺼내 들었다. 손가락으로 혈흔을 가리켰다. 9명의 배심원이 유심히 옷을 살폈다. 윤 검사는 뒤이어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감정서를 내밀었다.

이날 재판은 대검찰청이 내년에 시행되는 배심제 재판에 대비해 공판을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전국 검찰청의 공판 검사들이 판사.검사.변호인과 피고인.증인 역할을 했다. 배심원단은 본지 기자를 포함해 법률가가 아닌 9명으로 구성됐다. 배심원이 있는 재판의 법정 공방은 과거 재판과 달랐다. 검사와 변호인은 판사보다 판사석 좌측에 앉은 배심원들에게 더 많은 눈길을 보냈다. 배심원의 평결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년부터 일부 재판에 도입되는 한국의 배심 재판에서 판사는 배심원의 평결을 참고해 형을 선고하게 된다. 검사에겐 판사가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법리를 설득시키는 역할이 추가된 셈이다.

◆ 배심원을 감동시켜라=모의 법정에 오른 재판은 바람난 아내를 살해하라고 지시한 가상 피고인인 박모씨의 살인 교사 사건. 중소기업 사장인 박씨는 자신의 조카이자 운전 기사에게 살인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살인범으로 체포된 운전기사는 경찰 조사에서 박씨가 살인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씨는 경찰에서 자백을 했지만 재판정에선 혐의를 부인했다.

변호인 역을 맡은 최재아 검사가 무죄를 주장했다. "사랑했던 아내를 잃고 슬픔에 빠진 남편. 거기에 자신의 심복이 살인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변호인은 남편이 회한과 죄책감에 자포자기하고 무조건 '예'라고만 답한 것이 자백이 됐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또 살인자와 아내의 행적을 근거로 치정에 얽힌 단독 범행이라는 주장을 했다. 배심원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순간 검찰 측이 '찬물'을 끼얹었다. "추측으로 심문하고 있다"고 항의한 것. 뒤이어 검찰은 "남녀가 양평에 놀러가면 모두 불륜입니까. 모텔이 많은 곳에 함께 가면 모두 성관계를 갖습니까"라며 자극적인 반론을 펼쳤다.

이날 재판은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됐다. 검찰은 "살인자가 단독으로 범행을 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변호인은 "단독 범행을 저지르고 모함을 한 것"이라는 취지의 논리를 전개했다. 배심원들은 중간 중간 턱으로 손이 올라가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등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심원 회의에서는 "살인 교사의 직접적 증거가 부족하다(무죄)" "살인범이 단독으로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유죄)"는 등의 토론이 이어졌다. 배심원단은 5대 4의 의견으로 무죄 평결을 내렸다.

김승현 기자 <shyun@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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