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미국의 FTA 재협상론을 우려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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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주 미국 정부와 의회의 다수당인 민주당이 '신통상정책 기조'에 합의한 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심상치 않은 난기류가 일고 있다. 신통상정책에 맞춰 한.미 FTA를 재협상해야 한다는 요구가 미 의회로부터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15일 '서울.워싱턴포럼'에서 "미국과 한국은 수주 안에 보다 강력한 노동.환경 기준을 반영하기 위해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신통상정책을 이미 타결된 한.미 FTA에도 적용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재협상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같은 요구는 한.미 FTA의 성과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국가 간 합의의 신뢰성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처사다. 우선 미국의 재협상 요구는 절차적으로 잘못됐다. 신통상정책은 분명히 한.미 FTA 협상 타결 이후에 나온 미국의 내부 기준이다. 이를 근거로 국가 간 합의 사항을 소급해 뒤집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나 독단적이고 무례하다. 미국 정부와 민주당이 한.미 FTA가 타결되기 이전에 미처 정책기조에 합의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미국의 내부 사정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국가 간 합의가 번복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면 앞으로 어떤 협상도 불가능해진다.

미국이 요구하는 신통상정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국제적인 노동.환경 기준을 준수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이런 기준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굳이 신통상정책 때문에 한.미 FTA의 타결 내용을 바꿀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미 의회에 계류 중인 다른 3개국(페루.파나마.콜롬비아)과의 FTA와 한.미 FTA를 싸잡아 재협상 대상으로 삼을 현실적인 필요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미국이 재협상을 거론하면 국회 비준을 앞두고 있는 한국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을 우려가 크다. 재협상 여지를 남겨두면 미국 의회에서의 비준도 불투명해진다. 미국 정부는 한.미 FTA를 뿌리부터 흔드는 재협상 요구를 즉시 중단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