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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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범죄를 수사하는데 있어,심증만 가지고 예단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은 없다고들 말한다. 수사관 자신들 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범죄를 수사하는 단계에 이르면 수사관의 심증은 사건해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심증이 맞아떨어져 큰 사건들이 속시원하게 해결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심증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됐을 경우 엉뚱한 사람이 혐의를 뒤집어쓰는 인권문제까지 야기한다는 점에서 섣불리 수사에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우리나라의 범죄수사 능력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수사관계자들의 자위일는지도 모른다. 수사관들이 갖는 심증의 정확도가 높기 때문이라면 더 할말이 없지만 적어도 과학수사라는 측면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미국이나 유럽 여러나라에 비할때 우리나라의 과학수사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과학수사란 과학적 지식과 과학시설 등을 최대한 이용한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수사를 뜻한다. 거기에 활용되는 학문은 생물학·화학·물리학·생화학·독물학·혈청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부터 범죄심리학·사회학·철학·논리학·법의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하다. 선진국에서는 과학수사를 뒷받침하는 이들 모든 분야의 학문을 총칭해 법과학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몇몇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과학수사가 아직 초보단계인 까닭이 검시제도에 있다고 보기도 한다. 미국 등 여러나라에서는 법의학전문가인 감찰의(medical examiner)가 따로 있어 검시책임을 맡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검시책임자인 검사의 지휘에 따라 의사는 다만 실무만 맡고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쳐 법의학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몇 중요한 사건들이 법의학자의 의견에 의해 해결된 일도 있고 보면 경청해 볼만한 대목이다. 어쨌거나 대검은 과학수사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뒤늦게나마 「유전자·마약실험실」을 개소했다고 한다. 열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사람의 무고한 범인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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