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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JC… 「경선출마」에서 「당잔류」까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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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새정치” 내세우며 구태 답습/비판하던 공작·폭로정치서 못벗어나/판단착오 결단부족… 몇차례 호기놓쳐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거부한뒤 독자출마길을 모색해온 이종찬의원의 당잔류선언은 이 의원 개인의 한차례 좌절이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풍토 전반의 체질개선과 새 모습에 대한 기대감의 좌절을 수반함으로써 허탈·비판이 뒤따르고 있다.
특히 경선출마에서부터 대선독자출마포기에 이르기까지 과정에 나타난 이 의원의 행동은 그가 표방한 「새정치」와는 거리감이 있고 구틀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인사가 적지 않다.
그는 자신이 기성정치의 폐단으로 규정,비판의 표적으로 삼아온 밀실·공작정치와 비방·폭로 등 저급정치를 스스로 연출함으로써 새 정치의 한계를 노출시켰다.
그가 펼친 정치행위 또한 대의에 기초하거나 솔직·담백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전술차원의 기교수준에 맴돌았다는 인상이며 지도력·친화력 빈곤까지 드러냈다고 지적되고 있다.
이 의원을 아끼는 사람들은 그가 판단착오·결단력 부족으로 몇차례 중대고비를 놓쳐버렸다고 매우 안타까워한다.
첫번째가 경선거부 대목으로 거부할게 아니라 당당히 맞붙었다면 33.3%보다 훨씬 높은 득표율을 보였을테고 그만큼 정치적 입지와 선택의 폭도 넓어졌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두번째는 경선후의 태도. 비록 경선거부입장을 취했더라도 즉각 결과에 승복했더라면 비주류 수장으로서 당내위치가 견고하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이다.
세력규합에 실패한 나머지 「굴복」의 모습까지 띤 그의 이번 잔류결심과 견줘볼때 어떠한 선택이 바람직했는지는 쉽게 비교되어진다.
승복이 어려웠다면 즉각 분명한 태도표명을 보이고 독자노선의 길을 택했어야 옳았다는 의견도 많다.
결국 엉거주춤한 상태로 시간을 끌다 스스로 자기진영에 대한 회유·압력의 길을 열어놓았고 좌절을 자초한 셈이 됐다.
많은 아쉬움과 비판에도 불구,집권여당사상 최초로 대통령후보 경선제도를 이끌어내 정당민주화의 길을 선도했다는 공동의 공로는 나름대로 평가받고 있다.
또 비록 집권말 권력 누수현상에 직면한 대통령이긴 하지만 여당생리상 용납되지 않았던 저항·불복의 자세를 취해 일부에서 「용기」로 미화되기도 한다.
이제 이 의원은 차기대권주자가 되기 위해선 또다시 당내쟁투를 벌어야하나 여건은 결심을 늦게한만큼 어려워졌다고 하겠다.
세대교체의 선두주자로서 새롭게 되살아날 수 있느냐 여부는 이번 과정에서 그에게 쏟아졌던 비판을 어떻게 수용,극복하느냐에 달렸다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민자당경선 참여 이후의 이 의원 행동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곳곳에서 논리모순,말·행동의 어긋남 등 실망스런 대목과 자주 만나게 된다.
이 의원은 3월30일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면담에서 경선출마뜻을 공식으로 밝힌뒤 잇따라 같은 뜻을 천명한 박태준최고위원·이한동의원 등과 1차 경합을 벌였다.
당시 민정계후보 단일화를 논의한 7인협에서 이 의원은 자신으로 단일화되지 않을 경우 별도 출마할 뜻을 여러차례 밝혀 타협정신을 외면했다.
7인협은 외압시비끝에 박 최고위원과 이한동의원의 양보로 4월18일 새벽 이 의원을 단일후보로 추대한다.
이 의원이 내걸었던 캐치프레이즈는 새정치 구현과 세대교체론. 이 의원은 4월2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정치를 구현하고자하는 절대다수 국민과 당원들의 여망에 따라 당내 경선에 출마키로 했다』고 출마동기를 밝히고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시대에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분들은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완수했으며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도 두김씨가 대결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고 세대교체론을 폈다.
그러나 김영삼후보측의 세몰이에 정책대결보다 시종 폭로전과 경선포기 협박으로 맞섰고 선거규칙을 무시한채 서울·대전·광주 등지에서 대규모 장외집회를 강행함으로써 그같은 슬로건을 무색케했다.
이 의원은 처음 『모양갖추기식 경선이라면 중단하고 싶다』는 으름짱에서부터 시작하여 『줄 똑바로 서라는 외압이 자행되고 있다』『노심을 왜곡전파한다』고 트집잡았으며 급기야 『노심의 실체가 노 대통령의 뜻임이 드러났다』고 노 대통령을 정면으로 걸고 넘어지는 등 경선거부 협박을 최대무기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는 박 최고위원에게 가해졌던 출마포기외압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않아 앞뒤 모순을 드러냈으며 끝내 외압의 실체는 밝히지 않았다.
전당대회를 사흘앞둔 5월16일 밤 이 의원은 노 대통령과 면담,경선에 끝까지 응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면담직후 불공정시비를 다시 제기한 뒤 경선거부를 선언했다.
○…경선거부후 이 의원은 당내 투쟁의지와 신당창당 의사를 함께 표시하며 양다리작전을 펼쳤다.
이 의원은 예상을 깨고 33.3%라는 높은 득표율이 나오자 매우 고무되어 『우리가 진정한 승리자다. 오늘 내게 던져진 표의 뜻은 당내 민주주의를 좀더 철저하게 이뤄달라는 요구』라며 당내투쟁을 선언했다.
이 무렵 이 의원은 당내 개혁을 표방하며 새정치모임을 결성했고 이로 인해 노 대통령의 징계지시 등 징계움직임이 있자 신당창당설을 부인하면서 김 대표와의 대화 선결요건으로 불공정행위 시인과 징계정국 일단락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5월30일 대전 유성에서 있은 「새정치모입 세미나」에서는 『비주류로 당에 잔류하지 않고 한국정치의 일대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탈당가능성을 시사했다.
대의에 바탕을 둔게 아니라 차차기 유리한 고지 점령이라는 정치적 득실계산에 치우친 저울질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결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지적되는 대목이다.
이 의원의 행보는 6월에 접어들면서 독자노선쪽으로 더욱 빨라져 『지방자치단체장선거는 법에 정해진대로 실시돼야한다』며 「선광역­후기초」의 여야중재안을 제시하는가 하면 양김대결구도가 가져올 폐해를 지적하는 등 딴살림의도를 점차 구체화시켜갔다.
20일 「새정치와 경제발전」이란 세미나에선 『새정치국민연합은 7월초에 활동을 개시하게될 것』이라고 공언,7월초 탈당→8월 신당창당의 수순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동조자의 이탈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의 허점과 고민을 간파한 김 후보의 집요한 설득에 마침내 좌절하고 말았다.
김 후보와 두차례의 비밀회동이 있었으며 잔류조건으로 모종의 대가가 지불됐다는게 지배적 관측이고 보면 그는 끝내 자기가 비판해왔던 밀실 흥정에 응함으로써 자기논리의 정당성을 상실하고 말았다.<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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