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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 속 두 소년이 추던 조선 춤 … 지금도'공연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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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해마다 10월 말이 되면 일본 오카야마(岡山)현 우시마도(牛窓)에 있는 작은 마을의 신사(神社) 앞마당에서는 독특한 공연이 열린다. 두 소년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입술에 연지, 이마에 붉은 십(十)자를 그린 채 7~8분 추는 춤인데, 일본 전통예술과는 전혀 다르다. 패랭이를 닮은 모자와 구름 무늬가 들어간 상의, 발목을 졸라맨 바지 등 옷차림은 한눈에 조선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가라코 오도리(唐子踊)라 불리는 이 춤은 조선통신사가 일본 땅에 남긴 대표적인 문화 흔적 가운데 하나다. 12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양국 고위 관리.문인들 사이의 외교.교류만 수행한 게 아니다. 이국에서 온 대규모 사절단의 모습은 일본의 보통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문화적 충격을 줬다. 그들은 이때의 감흥을 춤이나 축제 등으로 표현해 오늘에 전하고 있다.

◆ 통신사는 문화 전령사=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주요 항구였던 우시마도는 시모카마가리(下蒲刈)를 떠난 통신사 일행이 늘 쉬거나 묵던 곳이다. 1624년 통신사의 부사(副使)였던 강홍중은 우시마도의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숙소인) 혼렌지(本蓮寺)에 짐을 풀었다. 배에서 내린 곳에서 절 앞에 이르기까지 늘어선 인가만 수백여 채. 구경하는 남녀가 담장처럼 길가를 가득 메우고…."(동사록)

400~500명의 통신사 일행 중에는 정사.부사.종사관 등 고위 관리도 있었지만 통역 등 잡다한 사무를 보는 사람이나 시종은 물론 각종 기예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종합 문화사절단이었던 셈이다. 신분이 낮은 일행들은 민가를 빌려 숙박해야 했다.

에도 시대의 일본 백성 또한 소속 번(藩)의 울타리에 갇힌 존재여서 수십 년에 한 번 오는 통신사 행렬은 평생에 한 번 볼 큰 구경거리였다. 다카하시 시게오(高橋重夫.65) 전 세토우치시 교육감은 "에도 막부는 보통 사람들이 통신사 일행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평생 다시 못 볼 구경거리를 맞은 백성들의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통신사 일행 중에는 사신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춤과 노래도 할 줄 아는 어린이(小童)가 10여 명씩 있었다. 바로 이들이 우시마도에 가라코 오도리를 남긴 것이다.

신유한의 해유록에는 "악공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두 동자를 마주 세워 춤을 추게 하니 왜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부분이 있다. 소동들의 무용을 본 현지인들이 이를 흉내 낸 춤을 만들어 전하게 된 것이다. 우시마도 외에도 미에(三重)현 쓰(津)시의 와케베진자(分部神社)와 스즈카(鈴鹿)시 히가시다마가키초(東玉垣町)에도 비슷한 춤이 전해진다.

춤은 아니지만 기후(岐阜)현 오가키(大垣)시에 남은 조센야마(朝鮮山車)도 흥미로운 예다. 일본인이 축제인 마쓰리를 할 때는 야마(山車)라 부르는 가마나 수레를 메고 끌며 가는데 오가키시에는 야마를 장식했던 조선통신사의 복식과 깃발 등이 전해져 온다.

◆ 시민간 교류 지금도=우시마도를 떠난 통신사 일행의 다음 기착지는 무로쓰(室津)였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효고(兵庫)현 다쓰노(龍野)시 미쓰초(御津町)에 속하는 인구 1000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지만 에도 시대에는 교통의 요지로 번성하던 곳이었다.

무로쓰 향토자료관인 가이에키칸(海驛館)에서 일하는 가시야마 야스노리(栢山泰訓)는 "무로쓰에는 당시 지방영주인 다이묘(大明)들의 전용 숙소인 혼진(本陣)이 6곳이나 있었고 한때 절이 12개나 될 만큼 마을 규모에 비해 번화한 곳이었다"고 말했다. 통신사 일행도 늘 이곳을 거쳤다. 통신사를 위해 포구에서 배를 내려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영빈관을 지었다. 지금 이 자리는 주민센터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가시야마는 자신이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무로쓰를 살리는 모임' 등 여러 시민단체의 힘을 모아 장기적으로 옛 영빈관을 복원할 계획이다. 정부 돈으로 서둘러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시민들을 설득하고 참여시켜 차근차근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통신사를 매개로 한 양국 교류도 두 나라 시민단체들이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통신사가 오갔던 '바다의 길'인 세토나이카이를 문화 교류의 상징으로 양국 시민단체가 힘을 합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추진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다.

'조선 춤' 가라코 오도리
복장.음악 등 일본 전통 문화와 큰 차이

우시마도에서 매년 가을에 공연되는 가라코 오도리. 모자와 붉은 색상의 구름무늬(飛雲紋) 상의, 밑을 동여맨 바지에 조선시대의 복식 문화가 남아 있다.[세토우치시 교육위원회 제공]

가라코 오도리는 매년 10월 말 우시마도 일대에서 열리는 축제 때만 공연된다. 우시마도의 곤노우라(紺浦)라는 마을에 있는 야쿠진자(疫神社)가 주무대다. 주연을 맡은 두 어린이는 5~6세에 처음 뽑혀 11~12세까지 계속한다.

마을 사람들이 두 어린이를 목말 태워 신사 앞마당에 도착하면 공연이 시작된다. 야쿠진자에서 두 차례 공연한 뒤 마을 안 세 곳에서 한 차례씩 더 공연한다.

이 춤의 형식과 배경 음악, 어린이들의 복장 등은 모두 일본의 전통문화와 차이가 크다. 복장만 해도 발목을 졸라맨 바지 같은 옷차림은 일본에 없다. 이 춤의 반주에 쓰이는 피리도 구멍이 6개짜리로 일본 전통 예능에 흔히 쓰이는 구멍 7개짜리와는 구분된다.

세토우치시 교육위원회의 와카마쓰 다카시(若松擧史) 주임은 "춤의 유래를 두고 예전에는 중국에서 왔다는 설, 일본 고유의 것이라는 설 등이 있었으나 학문적 연구와 고증을 통해 조선통신사의 흔적이라는 게 명백해졌다"고 말했다.

통신사의 행적이 요즘처럼 낱낱이 알려지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는 이 춤을 두고 신공황후(神功皇后)와 관련 짓는 경우도 있었다. 신공황후는 임나일본부설 등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을 정당화하는 데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 지금은 실존했는지조차 의심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한반도와 관련한 문물이 나오면 으레 따라붙었다. 그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한 뒤 삼한의 왕자를 볼모로 데려오다 이곳에서 쉴 때 춤을 추게 했는데 그것이 천 수백 년에 걸쳐 전해져 왔다는 황당한 설이다.

이 춤이 신공황후가 아니라 조선통신사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발품을 팔며 끈질기게 연구하고 사료를 발굴한 재일 사학자들과 일본 향토사학자들의 공이 컸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 교수는 이 춤이 1748년 통신사 때 전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힌 바 있다.

◆ 특별취재팀 = 박소영.이승녕(국제부문).김태성(영상 부문) 기자, 예영준.김현기 도쿄 특파원

◆ 도움말 =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 나카오 히로시(中尾宏) 교토 조형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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