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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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디어 세상은 정말이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콘텐트를 얼마든지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기술이 쏟아지고 있다. 또 외국방송을 같은 시간에 우리말로 들을 수 있는 기술까지 개발됐다. 머뭇거리다간 미디어소비의 '왕따'가 될 지경이다.

국내에서 디지털케이블TV 등이 제공하는 주문형비디오(VOD)와 '손 안의 TV'인 디지털멀티미디어이동방송(DMB)을 즐기는 소비자, 이른바 디지털미디어(DM)족은 1200만 명에 육박했다. 언제 어디서나 미디어와 접속하는 이들은 미디어 소비패턴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을 붙잡으려는 세계 미디어 업체의 행보는 분주하다.

지난달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TV프로그램 박람회(MIP-TV)엔 행사 사상 최대인 1만2000여 명의 미디어 관계자가 몰려 경쟁력 있는 콘텐트를 고르느라 열을 올렸다.

그뿐인가. 미 마이크로소프트는 야후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미디어 업계의 큰손인 루퍼트 머독은 월스트리트저널을 소유한 다우존스를 사들이겠다고 공언했다. 이 모두 콘텐트를 보강해 '미래의 미디어 소비자'를 끌어들이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이런 세계 미디어시장의 변화에 둔감하다. 낡은 틀에 묶여 있는 미디어 관련 정책은 디지털로 무장한 미디어기술과 따로 놀고 있다.

방송과 통신을 한데 묶어 미래 미디어 정책의 밑그림을 그려야 할 방송통신위원회 구성은 답보 상태다. 기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는 인터넷TV(IPTV)는 아직 서비스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고 있다.

IPTV 사업을 준비하는 KT 등 통신업체는 냉가슴만 앓고 있다. 기술은 다 개발됐는데 서비스를 할 길이 없다고 볼멘소리다. 게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콘텐트 시장이 사실상 개방돼 미국의 거대 미디어 그룹과 경쟁해야 하는데 여차하면 시장을 다 내줄 판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미디어 업체 간 인수합병(M&A)이나 전략적 제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현행 법과 제도 아래에선 이도 여의치 않다. 우리 국민 넷 중 한 명이 디지털 미디어로 일상 생활을 즐기는 세상이다. 국내 미디어업체들이 세계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도록 이젠 법이나 제도가 출구를 열어줘야 할 때다.

하현옥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