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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탐구 정적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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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적과 동지 분명히 구분… 사생결단형 YS/만일 대비해 복선깔아 … 이이제이형 DJ/비판 용납못하고 한번 밉게보면 “끝” CY/매정하게 자르는 가혹함은 공통/양김씨 마음속엔 본능같은 「응징개념」 박혀/정 후보는 약육강식의 「노가다 심리」 몸에 배
권력의 정상은 오직 하나다. 한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 대권의 주변 또는 대권 그 자체를 둘러싼 경쟁은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피나는 싸움이다. 대통령을 넘보는 사람들이 「정적」을 관리하는 방식은 개인적 스타일에 대한 흥미차원을 넘어서 정치권 전체의 안정성과 직결되는 중요 사안이다.
김영삼·김대중·정주영 3인은 모두 정당이나 대기업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늘의 자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다른 정당이나 기업의 지도자와 수없이 경쟁을 했을 뿐 아니라 그 자리를 넘보는 내부 경쟁자를 끊임없이 누르고 견제해왔다.
이들의 「정적」 또는 라이벌을 다루는 방식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가장 뚜렷한 공통점은 세 후보 모두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내려지는 가혹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두 김씨의 마음속엔 과거 독재권력과 비타협적인 투쟁을 할때 얻어진 본능같은 「응징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정주영씨 역시 『따내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는 건설사업 수주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노가다 심리」가 몸에 배어 있다. 세사람은 이같은 바탕위에 스타일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김영삼씨가 「오기」로 라이벌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면 김대중씨는 「꾀」를 내어 정적에 대항하는 장기를 갖고 있다. 김영삼씨가 적과 동지의 구분을 분명히 한다면 김대중씨는 간혹 상대방조차 헷갈릴 정도로 모호한 상태로 내버려 둘 때가 있다. 그래서 김영삼씨의 라이벌은 그가 『무섭고 독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김대중씨의 경쟁자는 그로부터 『속았다』는 느낌을 종종 갖는다.
87년초 신민당 이민우총재가 「직선제 개헌」 주장 대신 「선민주화 7개 조건」을 대정부 협상카드로 제시하자 당시 민추협공동의장이었던 두 김씨는 자신들이 모태가 돼 만든 신민당의 당권을 이 총재가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두 김씨는 결국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 총재를 버리고 새로운 당(통일민주당)을 창당해 직선제 운동을 전개해 나갔지만 공동의 라이벌이었던 이 총재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김영삼씨는 이 총재를 직접 만나 설득하다 안되자 오랜 계보동지로부터 배반당한 분을 달래기위해 지리산행을 했다. 그 결과 『민주화로 가는길엔 낙오자가 있게 마련』이라며 신당창당→이총재 고사의 정면돌파를 감행했다.
김대중씨는 신당창당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총재와 연결고리를 유지하려 애썼다. 김영삼씨를 만날 때는 직선제에 소극적인 이 총재의 「저의」를 비난했으나 이 총재에게는 자신의 측근 의원들을 보내 『김영삼씨와 별도의 독자세력을 만들어보라』고 부추겼다.
김영삼씨가 단선적인 힘의 원칙으로 정적을 상대했던 것에 비해 김대중씨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복선을 자주 까는 편이다.
두 김씨가 각기 숙명적인 대결을 벌였던 이철승씨에 대한 태도를 보면 이같은 차이는 더욱 실감난다. 김영삼씨는 74년,76년,79년 세차례에 걸쳐 이씨와 신민당 당권경쟁을 하면서 그와 사생결단의 쟁투를 벌였다. 그는 이씨의 중도통합론을 「사꾸라」로 몰아 붙이면서 두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투쟁무기는 「선명성」과 「야당성」이었고 여론을 폭풍처럼 불러 일으켜 상대방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돌파력을 보였다.
79년 5·30전당대회에서 1차투표때 결판이 나지 않자 당시 이 대표최고위원은 2차투표를 당초 계획대로 다음날 하자고 주장했으나 여론을 타고있던 김영삼씨는 『오늘 2차투표를 하지 않으면 당을 깨고 나가겠다』고 위협해 승리를 얻어냈다.
이에 비해 김대중씨는 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때 1차투표에서 김영삼씨에게 패하자 이철승씨에게 『나를 밀어주면 당신을 당수로 밀겠다』는 각서를 명함에 써주고 결선투표에서 승리를 따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씨를 당수로 밀어주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이씨가 유진산축출에 동조하지 않자 국회의원 공천권지분행사도 못하게 했다.
김대중씨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매정하게 자르는데는 김영삼씨와 다르지 않다. 85년 미복권 상태인 자신을 대신해 민추협과 신민당을 관리하던 김상현씨가 독립기미를 보이자 즉각 제거해버렸다.
그러나 제거방식은 김씨를 정면으로 설득하거나 공격하는게 아니라 김씨 주변을 드나드는 인사들에게 경고하고 김씨와 가까웠던 조연하의원을 국회부의장 임명에 반대해 김씨를 고립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간접적인 제거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김영삼씨의 직접 대결방식과는 다른 행태이다. 이는 두 김씨의 계보운영방식을 봐도 뚜렷이 드러난다. 김영삼씨는 20여년 자파계보를 단선적으로 관리·운영해왔으나 김대중씨는 자파계보를 여럿으로 나누어 상호경쟁·견제케 해왔다. 김염삼씨가 돌격형이라면 김대중씨는 이이제이형이라는 지적이다.
김영삼씨의 정면대결 스타일은 민자당합당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김씨는 합당후 ▲발철언의원의 도전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 ▲노재봉총리 사퇴문제 ▲총선전 대권후보 가시화 ▲후보경선 등 중요 고비마다 잔가지는 상대하지 않고 노태우대통령과 직접담파능로 문제를 풀어왔다.
그가 사용한 주무기는 상호 공멸을 의미하는 민주계탈당카드였다. 이 카드를 모태로 퇴임후 안위보장,친인척비리폭로 등 노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붙들고 결사항쟁을 벌였던 것이다.
노·김 양자는 후보확정후 더할 나위없이 좋은 관계를 맺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지만 노 대통령은 전당대회 이전까지만해도 김영삼씨의 파괴력을 앞세운 협박(?)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김대중씨는 퇴로를 열어놓고 복선을 깔며 간접공격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90년 10월 지방자치실시를 주장하며 단식투쟁을 벌인 것은 김씨의 투쟁방식상 예외적인 것에 속하고 요즈음 거리투쟁을 거부하는 유화적인 모습이 그의 본래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양김씨에 비하면 정주영씨는 굳이 정적을 가질만한 정치적 경륜을 쌓지 못했다. 다만 지난 1월8일 창당기자회견에서 노태우대통령에게 약 2백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폭탄선언」을 함으로써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돌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또 최근 모 월간지의 창간 리셥션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김영삼씨를 만나 악수를 하자마자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95년으로 연기하려 하니 당신은 법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대들어 이해를 다투는 라이벌에 대해 필요할때는 언제나 안면을 바꿀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정 후보는 이따금 자신의 경제적 성취에 도취해 상대방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재계의 라이벌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기업인수·합병 등 정권과 결탁해 성장한 사람으로 나와는 성장배경이 다르다』고 비판했다.
그는 내부적 비판자를 좀체 수용하지 않는 편이다. 기업활동을 할 때도 그렇고 국민당을 「경영」하면서도 그러하다. 누가 한 마디 하다가도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라고 일축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감히 정씨의 말 허리를 자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정 후보는 현대회장시절 하루아침에 이사이상의 중역 10여명의 책상을 지하식당 한쪽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만두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정씨는 종종 「증오의 인물관」을 지닌 것으로 지적된다. 그가 한번 사람을 밉게 보기 시작하면 혈연이건 부하직원이건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정씨와 경영철학이 달라 일찌감치 경영독립을 한 동생 인영씨(한라그룹 회장)는 형의 노여움을 받아오다가 15년이상 지난 최근에서야 병든 몸으로 형과 화해했다.
정계에 뛰어들 무렵 정씨는 거의 유일한 내부 비판자였던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과 수십년 인연을 끊어버렸다. 이 회장은 그룹 내부에서 정씨의 작용에 의해 고사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현대를 뛰쳐나와 민자당 전국구의원이 됐다. 정 후보는 이씨에 대한 괘씸한 마음을 풀기위해 이씨의 형으로 경북 영일­울릉에서 출마한 이상득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했으나 실패했다.<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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