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국논리」 속보인 미대법/문창극 워싱턴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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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 대법원이 미국법을 위반한 범인을 세계 아무 곳에서나 납치,미국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할 수 있다는 해괴한 판결을 내려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 1985년 미 마약단속정보원이 멕시코 마약조직으로부터 고문끝에 살해당하자 미 정부는 범인을 체포해 인도할 경우 5만달러의 현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시했고 범인중의 하나인 멕시코 의사가 현상금을 노린 멕시코인들의 손에 미국으로 납치돼 로스앤젤레스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미 연방 지방법원과 연방 항소심은 범인납치가 미­멕시코 범인인도협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기소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므로 범인을 멕시코로 되돌려 보내도록 판결했으나 연방 대법원은 6대 3으로 하급법원의 판결을 깨고 미국 정부의 기소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범인인도협정에 명시적으로 납치를 금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이같은 납치가 협정위반이 아니라는 내용과 함께 미국에 이미 19세기말 이와 비슷한 대법원 판례가 있었기 때문에 멕시코는 범인인도협정을 체결한 1978년 당시 미국의 국내법으로 국제 납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해괴한 설명을 덧붙였다.
현재 미국과 범인인도협정을 맺은 나라는 모두 1백3개국이지만 이 모든 협정문에는 범인을 납치하면 안된다는 조항은 없다. 왜냐하면 범인인도협정은 상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납치라는 방식이 아니고 합법적으로 범인을 서로 넘겨주고 받을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의견을 붙인 3명의 대법원 판사는 『범인인도협정을 맺은 나라간에 범인 체포를 위해 납치를 해도 된다는 해석은 충격적이다』면서 이 협정문 안에는 이미 납치를 금지한다는 의미가 애초부터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국가원수였던 노리에가를 체포해 현재 미국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게 하고 있는 상황은 이같은 미국의 궤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멕시코는 주권침해라는 항의와 함께 마약범죄 방지를 위한 양국의 협조를 일절 중단시켰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이 판결이 국제테러조직과 마약조직을 퇴치하는데 획기적인 쾌거』라고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결국 「힘센자의 정의」만을 판시한 미국의 오판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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