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TV 뒤집기] TV여, 진짜 쇼를 해 다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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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쇼를 하라!”고 느닷없이 외쳐대는 TV 광고에 한동안 가슴이 설렜었다. 그것이 외치는 대로 ‘세상에 없던 쇼’를 하는 새 TV프로나 하루 종일 흥겨운 쇼만 하는 채널을 기대하며 들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겨우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뚝뚝 끊어지는 상대방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 영상전화 서비스가 감히 쇼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보여준다(Show)’고 그게 다 ‘쇼’더냐?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땐가. 누구나 하나씩 휴대전화에 카메라를 들고 사용자 제작 콘텐트(UCC)를 양산해 내며 스스로 스타가 되고 미디어를 만들어 내는 시대가 아닌가. “쇼를 하라”는 외침은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 TV에 던지는 당당한 선전포고다. 시대가 그렇게 바뀐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이렇게 맞짱 뜨자고 덤비는 뉴미디어의 위협에 TV가 가장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돌파구 역시 쇼를 하는 일 같다. 그것도 ‘제대로 된 쇼’를 말이다. 엽기 발랄하고 재빠르지만 조악한 UCC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잘 준비된 프로들의 진중한 엔터테인먼트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있는 쇼.

나는 그런 최고의 TV쇼 모습을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본다. 내가 거의 ‘숭배’라는 표현을 쓸 만큼 좋아하는 이 쇼에는 TV 쇼에 바라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심사위원들이 전국에서 지원한 10만여 명의 가수 지망생 가운데 24명을 뽑고, 시청자들의 전화 투표로 마지막 한 명의 우승자를 가려낼 때까지 서바이벌로 진행되는 이 쇼에는 심사위원ㆍ참가자들의 캐릭터와 드라마가 있다. 진검승부를 겨루는 지망생들이 겪는 탈락의 아쉬움과 당선의 기쁨은 쇼 그 이상이다. 시청자들은 평범한 미국 소년소녀들이 세련된 스타로 변신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들의 꿈을 공유한다. 게다가 시청자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다. 전화투표를 통해 음악 비평가로 정중히 모셔진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뽑은 ‘아이돌’들은 빌보드 차트와 그래미를 거머쥐고, 심지어 아카데미까지 석권했다. 팬들이 일궈낸 스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다시 이끌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으로 쇼비즈니스의 선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아메리칸 아이돌’의 장점은 세대를 아우르며 10대와 부모 세대 어느 쪽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10~20대의 출연진에게 ‘1970년대, 80년대의 노래’라는 주제를 던져주면 이들은 기막히게 이것들을 리바이벌하면서 양 세대의 귀를 사로잡는다. 나 역시 이 쇼를 보면서 팝송 세대였던 내가 즐겨 듣던 노래들을 아들과 공유했고, 그렇게 학습된 열네 살 아들은 스티비 원더의 CD를 좋아라고 듣는다. 이런 과정에서 쇼를 즐기는 시청자의 어깨에는 음악의 여신 뮤즈가 조용히 내려앉으며 속삭이는 듯하다. ‘음악이라는 것이, 노래라는 것이, 쇼라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이냐고.

그런 쇼를 보고 싶은 거다. 스타들이 쥐어짜내듯 자신의 생활을 까발리고, 버라이어티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특기와는 상관없는 지질한 장기들을 펼치는, 그런 쇼가 아니라 진짜 자신이 잘하는 걸 열심히 뽐내고, 같이 즐거워하고, 그러면서 쇼의 위대함에 영감을 받아 내 생활이 풍성해지는. TV여, 쇼를 해 다오! 세상에 없던 진짜 지상 최대의 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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