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도 긴축이 불가피하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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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 각 부처가 경제기획원에 내놓은 내년도 예산요구 현황을 보고 우리는 몇가지 곤혹스러운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무리 정부가 예산절약과 긴축을 강조해도 실제 주요사업을 집행하는 개별행정부처는 이같은 지침을 남의 일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년 예산보다 무려 43.9%나 늘어난 예산(일반회계)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깎일 예산이니 많이 요청하는게 장땡」이라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공무원들에게 팽배한 것 같다. 기업들에는 거품경제의 진정 국면에 적응하기 위한 경영효율을 강조해온 공무원들이 말이다.
재정은 정부의 경제활동이다.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민주적인 경제행태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쪽에서는 대규모 정책사업을 공약하고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구조조정기금 등을 증액할뿐만 아니라 조세감면까지 약속하면서 근로자의 세금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소득공제한도 인상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들린다.
선심 쓸데는 많고 돈 들어올데는 줄어드는 판에 각 부처가 여전히 구태의연한 예산확보 경쟁에 나서고 있으니 재정정책에 대한 정부·여당의 가치판단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한국은행은 금융긴축을 강화하면서 재정도 쓰임새를 줄이도록 요구하고 있고 경제단체들도 선거를 앞둔 정부의 방만한 재정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내년도 예산편성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새 정부의 주요 사업에 대한 청사진을 미리 확정한다는 점에서 예년의 그것과는 다르다.
중앙정부 예산의 상당부분은 지방정부지원으로 충당되고 거기에 방위비와 공무원 인건비의 비중을 감안하면 사업비로 쓸 수 있는 가용재원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정부가 작년말부터 거듭 약속해왔던 경제안정을 위해서는 재정쪽에서도 긴축은 불가피한 형편이다.
따라서 한정된 재원을 어느 분야에서 얼마만큼 효용성있게 쓰일 수 있도록 배분하느냐가 예산편성에 임하는 정부의 과제요,고민일 수 밖에 없다. 각 경제주체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방위비 규모는 지난 82년의 GNP(국민총생산액) 대비 6.2%에서 올해는 3.7%까지 거의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병력의 규모를 줄이지 않고서는 방위비 감축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6공 출범이후 역점을 두었던 사회·복지부문에 대한 비용 지출을 감내하면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국가 경쟁력의 강화,이를테면 과학기술 진흥이나 사회간접시설투자를 어느 정도 강화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정부가 각계 전문가들과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재정의 역할과 앞으로의 운용방향을 결정해야할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자칫 나타나기 쉬운 선심성 예산편성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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