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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꽃피운 사회봉사 "치맛바람" 역풍도 「양지회」육 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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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양지회」라는 이름의 단체는 두개다.
하나는 전직 안기부(중앙정보부)요원들의 친목단체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안기부의 부훈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이 모임은 지금도 있다. 지난해 12월14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는 회원과 가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뷔페식을 겸한 대규모 망년회가 열리기도 했다.
또 하나의 양지회는 이미 사라졌다. 바로 육영수 여사가 주도해 창설했던 모임이었다. 고위공직자의 부인들로 구성돼 활발한 봉사활동을 펴나감으로써 찬사를 받았으나 한편으로 육 여사의 본뜻과는 달리 「막강한 치맛바람」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대통령·국무총리·감사원장·각부 장-차관·대통령비서실장·경호실장·특별보좌관· 수석비서관·서울시장·중앙정보부장·검찰총장·국영기업체장·은행장전원·합참의장·3군 참모총장과 해병사령관·군사령관·군단장·보안사령관·관구사령관….

<64년l2월에 발족>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실세가거의 망라된 이 엄청난 인물들의 부인이 바로 양지회 회원들이었다. 개각으로 자리를 물러난 이의 부인은 자동적으로 회원자격을 잃었다. 사단장이나 도지사 급 정도는 아예 모임에 낄 자격도 없었다.
전직 총리·장관 중 중량급 인사의 부인에 한해 모임의 명예회원으로 모셔졌으나 이미 남편의 갓끈이 떨어진 터라 나오기를 꺼렸다고 한다.
양지회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3년 회원수첩에는 총2백1명의 회원명단이 적혀있다. 명예회원 1백86명의 명단은 뒷부분에 별도로 추가됐다. 2백1명은 행정부 98명(청 장급이상), 국영기업체 42명(사장과 부사장), 금융단 28명(행장과 전무), 군부 33명(소장급 이상중 요직자)등으로 이루어졌다.
『5·16혁명 직후부터 육 여사는 사회의 그늘진 구석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무척 애썼어요. 당시만 해도 굶는 이들이 많았지요. 처음에는 배고픈 짐에 빵이나 밀가루를 갖다 주곤 했어요. 그러나 한두 끼니를 때우고 말뿐이었죠. 다음에는 자립정신을 길러준다는 취지로 닭이나 토끼를 여러 마리 기증했어요. 주로 신문기사 사회면에서 어려운 이들의 형편이 보도되는 것을 참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했지만 공짜로 얻은 가축을 잡아먹거나 팔아치우는 이들이 더 많았어요. 가마니 짜는 기계를 사주면 다음에는「판로가 마땅치 않다」며 가마니를 전부 사달라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여사님은 그때마다 가슴아파했습니다.』

<사치 말고 남 돕자>
최고회의 시절부터 육 여사의 비서로 일했던 H씨(여)는 『부인들이 사치하지 말고 가진 것을 조금씩 추렴해 남을 돕자는 것이 육 여사의 뜻이었다』며 『순수하게, 소문 안내고 일하려고 애쓰셨다』고 회고했다.
61년 가을부터 이주일·홍종철·장경순 장군 등 최고회의 멤버 부인들과 시작한 봉사모임은 민정이양 1년 후인 64년12월17일 「양지회」라는 명칭의 친목·봉사단체로 발전했다. 최고위원부인 가명뿐이었던 회원은 63년 3공화국초기 60여명으로, 양지회라는 명칭이 붙을 때는 1백30명으로, 70년대에는 2백명이 넘는 숫자로 늘어났다.
65년6월에는 회칙이 제정됐다.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부녀의 지위향상과 복지사회 건설에 기여함」이 모임목적으로 규정됐다. 이에 따라 ▲부녀층의 사회적 지위향상에 필요한 사업 ▲자선 및 원호사업 ▲선행권장을 위한 사업 ▲기타 본회의 목적달성을 위한 사업 등 네 가지 사업내용이 정해졌다.
모임 임원은 명예회장(대통령부인)·회장(국무총리부인)과 이사 약간 명을 둘 수 있도록 했다. 73년도 임원진 명단에는 명예회장인 육 여사를 비롯, 회장 박영옥여사(김종필 국무총리 부인), 총무 권모(문공장관 부인), 재무간사 김모(기획원장관 부인), 서기 유모(문공차관 부인), 행정간사 이모(상공장관 부인), 국영기업간사 노모(충주비료사장 부인)·이모(도로공사사장 부인), 금융단간사 한모(국민은행장 부인), 군부간사 현모(해군참모총장 부인), 명예간사 최모(전 해운공사사장 부인)·유모(전 상공차관 부인)여사등 12명이 올라 있다.
10여 년에 걸쳐 양지회 활동은 아직도 많은 국민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연말 일선 장병에게 보내는 위문대를 손수 만드는 고관부인들의 모습, 고아원·양로원·시립근로자합숙소를 수시로 찾아가 위문하는 회원들의 동정이 당시신문과 텔리비전에도 자주 비췄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지회는 언론에 보도된 이상으로 정력적인 봉사활동을 했다. 그 구심점은 물론 육영수 여사였다.

<자금출처 잘 몰라>
농촌에 양수기 보내기, 수재민에게 구호품 전하기, 낙도어린이에게 책보내기, 난민촌에 무료진료소 만들어주기, 사랑의 열매 전하기, 자선바자, 양지회관 건립등 대단한 노력이 육 여사가 작고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중 퍼스트레이디로서 육 여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나병(한센병·문둥병)환자 돕기 사업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병환자들은 전국에 흩어져 자기 가족에게조차 냉대 받으며 이 마을 저 마을 떠돌고 있었어요. 환자가 한 마을에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까지 돌을 던지며 사람 취급을 안 하다시피 했지요. 육 여사께서 이들에게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겁니다. 곳곳에 정착촌을 만들어 자립터전을 마련해 주었어요.』(진혜숙씨·현 배화여 전 교수·전 청와대비서관)
주 교수는 『한번은 영부인과 신현확 보사부장관, 몇몇 양지회 회원들이 나환자촌을 방문했는데, 수행원들이 망설이는 가운데 육 여사는 서슴지 않고 환자들의 손을 자연스럽게 덥석 잡아 수행한 이들을 감동케 했다』고 기억했다.
양지회가 이 같은 활동을 벌이려면 분명히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취재과정에서 만난 옛 양지회원중 상당수는 자금출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월3천 원의 회비와 바자 기부금으로 비용을 충당했다고 밝혔다. 『회비를 낸 기억이 없다』고 실토한 사람들도 있었다. 양지회 회칙(14조)은 「본회의 재원은 회비와 기부금으로 충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중 회비의 비중은 아주 미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직 장관부인으로 양지회의 임원을 지낸 A여사는 이 부분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털어놓았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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