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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길 걷다보니 아스팔트 “계란 맞더라도 현장 가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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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8면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슬픔과 행복 속에 우리도 변했구려…”

FOCUS 이웅열 코오롱회장 11년 만에 아버지와 외출

12일 오후 경북 구미의 ㈜코오롱 공장 잔디구장. 단상의 마이크를 타고 이동찬(85) 코오롱 명예회장의 노랫가락(서유석의 ‘가는 세월’)이 흘러나왔다. 작고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가사는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다. 특유의 카랑카랑함도 여전했다. 운동장에 모인 3000여 명의 임직원이 따라 부르면서 그의 노래는 이내 합창이 됐다. 현역 시절 이 명예회장을 기억하는 고참 직원들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어렸다.

이날 코오롱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기념행사가 열린 구미공장은 그룹의 모태나 다름없는 곳이다. 특히 이 명예회장에게는 구석구석 자신의 손길이 미친 곳이라 애착이 남다르다. 그는 심장에 무리가 간다는 의사의 말에 6년 전부터 노래를 삼갔다. 하지만 이날만은 예외였다. 노래가 끝나자 전 임직원이 그에게 큰절을 했다. 이어 노(老)회장은 우화 한 토막을 꺼냈다.

“눈ㆍ코가 입과 싸웠답니다. 고생해서 음식을 찾는 건 자기들인데 입은 먹기만 하니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입이 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눈·코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노사는 ‘한 몸’이니 이제 갈등을 접고 화합해 달라는 절절한 당부였다. 이에 배영호 사장과 김홍렬 노조위원장이 함께 ‘항구적 무파업’ 선언으로 화답하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행사의 숨겨진 연출자는 이 명예회장의 아들인 이웅열(51) 회장이었다. 두 사람이 공식행사에 나란히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96년 경영권 승계 이후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세세한 행사 내용까지 이 회장이 직접 챙겼다”는 게 코오롱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관계자는 “경영자로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섰다는 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는 상징적인 행사”라고 말했다. 그간 이 회장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형, 요즘 너무 편한 사람들만 만나고 다니는 것 아니야?”

코오롱 그룹이 한창 어려움을 겪던 때 이웅열 회장은 한 후배가 던진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2000년 들어 주력이던 화섬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04년에는 회사 구조조정안에 반발한 노조의 파업이 겹치면서 1500억원의 적자를 기록, 그룹 전체가 휘청거렸다.

외향적이고 사람 만나기 좋아하던 이 회장도 움츠러들었다. 바깥 나들이를 줄이면서 학교 선후배 등 부담 없는 사람하고만 어울렸다. 하지만 후배의 이런 따끔한 조언에 마음을 다잡았다. 일부러 현장을 찾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해 과천 코오롱 그룹 사옥 1층에 마련된 ‘실천 게시판’에 이 회장이 직접 쓴 다짐도 “한 달에 두 번 이상 현장에 가자”였다. 그리고 약 1년 만인 12일 구미행이 꼭 50번째 현장 방문이었다.

전날 열린 기자간담회는 ‘고난의 행군’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흙길을 걷다 보니 아스팔트 길이 펼쳐졌다”며 한숨을 돌렸다는 표현을 했다.

이 회장은 또 “내가 불편해야 기업이 잘된다면 기꺼이 불편해지겠다”고 했다. ‘마음 독하게 먹겠다’는 자기 주문인 셈이다.

이번 구미 행사도 모든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이 회장은 현지로 출발하기 전 숙소를 바꾸는 게 좋겠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가 머무를 호텔에서 노동단체의 돌발 시위가 예상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노”였다.

“계란을 맞아도 좋고, 밀가루를 뒤집어써도 괜찮다. 직원들이 그걸 보고 뭔가 느끼는 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생살을 도려낸 구조조정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지금도 이 회장의 서울 성북동 자택 앞에서는 해고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회사 내에서는 “적당히 타협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내가 불편한 것은 과정일 뿐 ‘과잉충성’하지 마라”고 못을 박았다.

‘독한 마음’은 그룹 인사에도 적용됐다. 그는 “개인적으로 인사(人事)를 할 때가 가장 힘들다. 그야말로 ‘사람 죽이는 일’(人死)” 이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인사에선 내가 편한 사람 대신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배치했고 만족한다”고 했다.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로 접어들었지만 그에게는 한때 ‘재계의 40대 기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여느 재벌가 자녀들과는 스타일이 달랐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속된 말로 현역 사병으로 ‘박박 기어’봤다. 군 시절 5사단 수색대에서 오후 4시쯤 비무장지대에 들어갔다가 새벽에 나오는 게 그의 일과였다. 말년엔 취사병으로 활약해 김치 담그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최전방에 있다 보니 일화도 많다.

“한번은 수색을 나갔다가 월남을 시도하는 북한군 장교를 발견했다. 본부에 인계하고는 ‘잘하면 포상휴가 가겠다’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웬걸, 이 친구가 TV에 나와 ‘철조망을 한 시간 반 동안 흔들어도 아무도 안 오더라’고 했다. 우리 소대장은 그날로 영창에 갔다.”

이 회장은 요즘 자주 자신감을 나타낸다. 노사갈등이 진정되고 부실 사업이 대폭 정리되면서 실적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미래다. 이날 행사에서 이 회장의 표정에 비장함이 스친 것도 이 대목에서였다. “중국 원자바오 총리가 SK를 찾아가는 걸 보고 최태원 회장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최 회장이 발로 뛰어 만든 결과다. 나도 더 뛰어야겠다.”

먼지 날리는 흙길을 가다 이제 막 아스팔트길에 들어서 한숨 돌리는 참인데 앞을 보니 최 회장은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모양새라는 얘기다. 최 회장은 그의 고교(신일고), 대학(고려대) 후배다. 더군다나 외환위기 여파로 2대 주주였던 신세기통신의 지분을 SK텔레콤에 넘겨야 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이동통신사업을 성장엔진으로 삼으려 했던 이 회장은 당시 “우리는 미래를 팔았다”며 침통해했었다. 재도약을 선언한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미래’ 찾기는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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