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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강야/정치혐오 키운 4년/막내린 13대 국회 영욕과 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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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상 첫 여소야대… 청문회·지자제 등 성과/수서비리·뇌물외유 의원 14명 구속 “얼룩”/정치무능·몸싸움·도덕성실추 극복 14대 과제로
29일로 13대 국회는 법정임기를 끝내고 30일부터 14대 국회임기가 시작된다. 그 어느때보다 영욕과 명암이 극명하게 교차됐던 13대 국회다.
13대는 원구성부터 여소야대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상황으로 출발했고 3당합당이라는 또다른 정치적 실험이 벌어진 격변기였다.
이 시절에 청문회·국정감사·지방자치제가 실현 또는 부활된 것은 유신이래 「권력의 시녀」에 불과했던 입법부가 제위치를 찾게된 민주화의 쾌거로 기록돼도 좋을 것이다.
이는 물론 13대 국회가 5공권위주의 권력에 맞서 싸운 87년 6·10시민투쟁과 6·29선언의 민주승리라는 정치·사회적 민주화과정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출범당시 의석수는 여당인 민정당이 1백25석,평민(70)·통일민주(59)·공화(35)·한겨레(1)·무소속(9) 등 야권이 1백74석으로 압도적인 야 우위상태였으며 김재순 당시 국회의장은 이같은 4당 구조를 「황금분할」이라는 비유로 표현했다.
13대 국회 초반은 5공 적폐청산과 민주적인 법령 정비 과정에서 일부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민주화의 새로운 바람이 불었던 시기다.
개원과 함께 3야당의 공조체제가 구축돼 ▲5공비리 ▲광주민주화 운동 ▲언론통폐합 청문회가 열렸고 TV생중계가 실시되면서 텔리비전 정치시대가 개막됐다.
청문회를 통해 5공세력 「권력관리」의 무모함과 무소불위 권력의 타락상이 속속 드러났고 광주사태에 대한 어느정도의 진상접근이 가능하게 됐다.
청문회 정국은 백담사로 유배된 전두환 전 대통령을 89년 12월31일 국회로 불러내 마지막 증인의 증언을 들으면서 끝났다.
이 시점은 여소야대의 불안정한 정국을 견딜 수 없었던 노태우대통령과 제2·제3야당의 위치를 탈피하고자 했던 김영삼·김종필씨의 3당통합이 준비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5공청산과정에서 자신의 뿌리인 전 전 대통령·정호용 의원 등 5공세력과 결별하게 된다.
90년 1월22일 선언된 3당합당은 정국을 단숨에 거여소야 체제로 뒤바꿨다. 「보수 대연합」의 정국구도속에 탄생한 민자당은 다수 세력의 힘에 의지해 금융실명제를 연기했고 국군조직법·방송관계법 등을 날치기 처리했으며,이 과정에서 사생결단식으로 달려든 야당과 심한 충돌사태를 빚기도 했다.
13대 후반 국회의 단골메뉴가 돼버린 실력저지→날치기의 모델이었다.
인위적인 정계개편의 후유증은 집권당 내부에서 더욱 심각했다. 1노2김이 합당 당시 「밀실합의」한 내각제 합의각서가 보도되면서 민자당내 권력투쟁이 날카롭게 부딪치게 되고 정치·사회적 불안정의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후반 국회는 민자당의 계파갈등과 야당의 강경투쟁·통합노력을 두 축으로 해 전개됐다.
90년 12월 평민당의 단식투쟁끝에 지방자치실시가 합의됐다. 5·16정변으로 폐지된지 30년만의 부활이었다. 거여에 맞선 야당의 자구책으로 재야세력의 정치세력화가 진행됐고 여러 중간단계를 거쳐 91년 9월 통합야당 민주당이 탄생했다.
거여의 권력투쟁 및 정치적 무능과 강야의 극한대응은 국회를 불모의 정치지대로 만들었다.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냉소를 넘어 혐오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정치위기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와중에 91년초부터 연쇄적으로 터진 의원비리·독직사건은 그나마 쌓았던 13대 국회의 업적을 휴지조각처럼 만들어 버렸다. 상공위원회 뇌물외유사건·수서비리사건 등이 연이어 터졌고 8명의 의원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3대 전체를 통해 모두 14명의 의원이 구속됐는데 이는 제헌국회의 「프락치사건」이래 가장 많은 의원이 구속된 것이다.
13대 초반의 중심 주제였던 정치의 민주화 문제는 사회 전반의 민주화 과정에서 상당히 묽어졌으나 도덕성 회복문제가 정치권이 해결해야할 커다란 숙제로 떠올랐다.
3·24총선의 집권당 참패로 14대 국회는 여야가 다시 균형된 세력을 형성하게 됐다. 현재 민자당은 1백52석,민주(96)·국민(33)·신정(1)·무소속(17)의 야당세력은 1백47석을 차지한 것이다.
14대 국회가 13대 국회의 어두운 유산인 ▲정치무능 ▲실력대결 ▲도덕성 실추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심이다.<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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