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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문민정책인가(권영빈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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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초여름의 훈풍이 불어오는 성북동 언덕위의 간송미술관에서 조선 남종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해마다 5월과 10월 두차례에 걸쳐 어김없이 열리는 간송미술관의 기획전은 올해가 42회로 21년째를 맞았다. 간송 전형필선생이 남긴 국보 보물급 20여점을 비롯,아직도 미정리 상태인 수십여만점의 소장품을 정리,분류해 해마다 두차례씩 전시회를 열어오고 있다.
○마을속의 문화공간
선대가 사재를 털어 필생의 사업으로 수집했던 고미술품을 분류·정리·연구해서 전시하는 사업이 아들 전영우관장의 몫이 되었다. 대학교수인 그가 민족미술연구소를 운영하고 한해 두차례의 기획전을 열면서 작품을 손질·표구하고,해설서를 만들어 미술 동호인들에게 일일이 우송한다. 누가 시켜서,누가 도와주어서가 아니라 선대의 유업이기에,민족미술의 보전과 연구를 위한 평생의 업이기에 스스로 즐겨 택한 길이다.
간송미술관이 있기에 우리는 쉽사리 민족미술의 정화를 접할 수 있고,개인의 소장품을 연구하고 공람시키는 갸륵한 후대가 있기에 민족미술은 산일되지 않고 온전히 계승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은 「작은 국립박물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토탈 현대미술관이 최근 개관해 심문섭조각전을 열고 있다. 문화공간이라고는 전무한 산동내에 경사가 났다고 동네사람들은 기뻐했다. 개관식이 있던 날 주민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참가해 축하했다. 한 동내에 사는 첼로 연주자는 솔선해 개막 연주를 맡았고 음악평론가의 음악감상법 강의에 이어 조각가의 작품설명회가 있었다. 이를테면 주민들의 문화강좌가 열린 셈이고 앞으로도 이런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 계획이라고 한다.
일요일이면 동네사람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전시장을 돌아보고 앞마당에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코피 한잔을 마시는 삶의 여유를 누린다. 건축가 문신규씨부부가 도시 마을속의 문화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일념에서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 문을 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시대에 필요한 두개의 전형적인 미술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개인이 사유화하거나 은닉시킬 수 있는 비장의 미술품을 미술관을 통해 공람시키고 공유화한다는 의미에서 미술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또 하나는 도시화·산업화에 따른 삭막한 도시생활에 문화공간을 세움으로써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자는 의미에서의 미술관이 요청된다. 아무도 찾지않는 외딴 곳에 유아독존격으로 세워진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니라 생활과 함께 숨쉬는 문화공간의 확대가 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정책인 것이다.
○무너지는 기반시설
우리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늘어나는 것은 술집이고 비디오가게·전자오락실 등이다. 줄어드는 것은 책방이고 도서관이고 미술관이다. 심지어 책방을 걷어치우고 성황중인 노래방으로 개조중인 서점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문화의 기반시설이 무너지고 있는 이 개탄스런 사회풍토에 건전한 문화공간을 정책적으로 늘려야 한다는게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문화정책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취지와 목적의 일환으로 문화부가 추진한 것이 「박물관 미술관진흥법」이고 99년까지 1천개의 미술관을 확보하자는 운동을 벌이게 된 동기라고 본다. 그러나 미술공간을 확대하고 예술문화를 진흥하자는 정부의 의도가 자칫 진흥이 아닌 억압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미술계에서 일고 있음은 웬일인가.
6월1일부터 시행할 「박물관 미술관 진흥법」을 비판하는 입장에선 첫째,법령들이 권위주의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진흥보다는 억압하고 한정하는 요인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행정편의적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장관이 개관을 명할 수 있는 악용될 장치는 두고 있으면서도 박물관 미술관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장치는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독자적으로 어렵사리 민족미술을 보전하고 연구해온 미술관에 대해선 단한푼의 지원이나 후원한번 없다가 까다롭고 번잡한 시행령조항을 어겼을 경우에는 관한 관청이 휴·폐관을 명하는 악용의 소지로 작용할 수 있다.
둘째,미술관진흥이라는 모법의 취지와 시행령간에 상호모순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거지역속의 문화공간 활성화는 적극 권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행의 도시건축법상에는 주거전용지역에서의 미술관 설립을 금지하고 있다. 모법의 취지에 맞춰 시행령의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
○세련된 문화입법을
물론 법이란 선의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않고 악의의 인물들이 악용하고 오용할 소지를 없애기 위해 최악의 상태를 전제로 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왕 문화 예술의 진흥을 위한 법령이라면 지원과 육성을 위한 정부의 근본취지가 법으로 살아나야 할 것이다.
벌주기 위한 법적 조치가 아니라 지원과 진흥을 위한 문화예술법이다.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오락문화의 홍수속에서 사라져버리는 문화의 기반시설을 하나라도 더 육성하고 지원함으로써 건실한 문화공간을 확대하는 쪽으로 기능해야하는 것이 오늘의 문화정책일 것이다.
박물관 미술관 진흥법도 같은 맥락에서 입법취지에 걸맞게 중지를 모아 세련되고 걸맞게 다듬어지는 계기가 다시 한번 이뤄지기를 촉구하고 싶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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