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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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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정효가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주인공 이름을 '임병석'으로 정한 건 '병석(病席)'을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생이 꼬여 버린 게 기구한 운명뿐만 아니라 독특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는 냄새를 은연중 풍기고 싶었다.

픽션은 그렇다 치고 현실 세계의 성명(姓名)이 그 주인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그저 이름일 따름인가. 성명학자들은 물론 영향이 있다는 쪽이다. 그러면서 그리스 신화의 조각가 이름을 딴 '피그말리온 효과'를 흔히 거론한다. 주변의 기대와 관심이 클수록 훌륭한 사람이 된다, 즉 좋은 작명은 그만한 값을 한다는 뜻이다. 이를 진지하게 믿지 않는 부모라도 새 생명의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열망해 멋지고 뜻깊은 이름을 지어 주고자 머리를 쥐어 짜곤 한다. 농구 스타 이상민이 '민첩할 민(敏)'을 '온화할 민(旼)'으로 바꾼 건 플레이가 워낙 날쌘 데다 '敏'자까지 쓰는 바람에 부상이 잦은 게 아니냐고 부모가 염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Harvard(하버드대).Doctor(의사.박사).Senator(상원의원) 같은 이름이 늘어난다니 부모 마음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예전에는 드라마 주인공 '김삼순'처럼 이름이 부담스러운 이들이나, 전과자.신용불량자 등 부득이한 사유의 개명 신청이 많았다. 근래에는 취직.사업.결혼.입학 운세에 좋은 이름으로 갈아타려는 경우가 급증했다. 게다가 법원의 개명 허가 기준이 완화되면서 올 들어 한 달에 1만 건 넘게 신청이 몰린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회사 명패 바꿔 달아 주가를 띄우기도 하지만 주민등록증 바꾼다고 팔자가 금세 달라질 건 없다. 미 뉴욕 할렘가의 한 흑인 가장은 첫 아들의 성공을 기원해 위너(Winner)라는 이름을, 둘째 아들은 대구(對句)를 맞춘다고 루저(Loser)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그런데 형은 부랑자로 전락했고, 동생은 경찰 간부로 출세했다. 캘리포니아주의 아동 이름을 빈부 계층, 흑백 인종별로 분석해 봤더니 '이름과 성공은 별 관계가 없다'는 결론이었다(스티븐 레빗, '괴짜 경제학').

김승연(金昇淵) 한화 회장이 4년 전쯤 이름의 '오를 승(昇)'을 '되 승(升)'으로 바꾼 일이 뒤늦게 알려졌다. '升'은 '昇'의 새김 이외에 전진.태평.번성 같은 좋은 뜻이 풍부하단다. 사업 번창을 희구한 개명이라는 주변의 설명대로 대한생명을 품에 안는 등 사운이 피었지만, 개인적으론 최악의 불운에 시달리고 있다. 이름과 운세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