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현지 생선을 한국으로 수입하려면 보통 석 달씩 걸리죠. 그런데 앞으로 이곳의 냉동창고를 이용하면 물건을 확인하고 바로 사갈 수 있게 됩니다." 사업 초기엔 3~4개 노르웨이 수산회사가 참여하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다음 바이킹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시설을 차차 갖춰나갈 생각이다.
70을 넘긴 나이지만 그는 요즘도 새 사업 추진에 여념이 없다. 현지인들이 안 먹는 해산물을 한국이나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이다. "성게.해삼. 골뱅이가 바다에 널려 있어요. 한 사람이 서너 시간이면 20리터 한 통을 채울 수 있지요." 현지에 해산물 요리학교를 설립하는 계획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프로야라는 작은 섬마을에 씨푸드 아카데미를 세워 요리를 가르치고 경연대회도 연다는 구상이다. 요리대회 우승자에겐 부상으로 물개들이 사는 작은 바위섬을 하나씩 주기로 시 측과 이미 협의가 끝났다고 한다. 그는 6000개의 바위섬으로 구성된 프로야시의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그가 1980년대 후반 노르웨이에 처음 알린 라면은 지금도 인기가 높다. 일본의 닛신식품 등 약 30개 제품이 시판되고 있지만 그의 브랜드 '미스터 리' 라면이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6.25 때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고 치료차 19세때인 1954년 노르웨이로 온 그는 호텔 주방장을 거쳐 식품사업으로 뿌리를 내렸다. '노력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 는 선친의 말씀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그는 지금도 항공여행 때 이코노미석을 이용할 정도로 검소하다.
오슬로=심상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