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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두목’으로 몰린 장보쥔과 그의 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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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6면

교통부에서 부원들에게 둘러싸여 비판받으며 괴로워하는 장보쥔의 모습은 반우파투쟁의 상징이 됐다. 김명호 제공 

1957년 낡은 습관에 젖어 있는 세력들에 의해 공산당이 침식되기 시작했다며 대규모 계급투쟁이 몰아닥쳤다. 제일 먼저 호응한 것이 지식분자들이었다. 당 조직이나 간부들에게 비판적인 의견을 제출했다. 사회주의를 인정하고 옹호한다는 대전제하에서였다. 직장마다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어서 반우파투쟁이 벌어졌다. 50여만 명이 당 지부 서기의 도장 하나로 우파분자로 확정됐다. 그 후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있다. “태평성세의 개로 태어날지언정 난세의 인간이고 싶지는 않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⑦ ‘우파 두목’으로 몰린 장보쥔과 그의 딸

진보적 지식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공산당도 이들을 연합해야 할 하나의 계급으로 인정했기에 실권은 없지만 직급은 높은 자리가 주어졌다. 당의 보호 아래 언론과 학문의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우파라는 모자가 씌워졌다.

우파 두목으로 지목된 인물이 장보쥔(章伯鈞)이었다. 민주세력의 연합체인 민주동맹의 실질적 책임자로 교통부장, 정협 부주석, 광명일보 사장 등을 겸하고 있었다. 광명일보는 민주동맹의 기관지였다. 부장으로 있던 교통부에서 비판받으며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은 두고두고 반우파투쟁의 상징이 됐다. 그는 실각한 후에도 직급이 3급에서 7급으로 강등됐을 뿐 하루 열세 시간까지 노동을 해야 했던 50여만 명의 우파들에 비해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던 1969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은 비참했고 81년 모두가 복권될 때에도 제외됐다.

그의 딸 장이허(章 和)가 반우파운동 때부터 보고 겪었던 부모는 물론 그들과 가까웠던 지식인, 스승, 문인, 예술가들의 고난을 유려한 문체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61세 되는 해부터였다. 자신도 20대 말에 우파로 몰려 2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옥중에서 딸을 낳고 남편과 사별했지만 개인의 억울함이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반세기가 지난 후 정부는 크고 사회는 작은 줄만 알았던 대다수 중국인의 고정관념이 바뀔지도 모를 일에 자신의 딸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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