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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10분의 1'에 맞선 昌의 고해성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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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5일 오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서 시종 굳은 표정으로 불법 대선자금 모금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문을 읽었다. 지난 10월 말 최돈웅 의원의 SK비자금 1백억원 수수에 대한 대국민 사과 이후 두번째다.

수십여명의 취재진이 몰려 쉴새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잠을 못 이룬 탓인지 그의 눈은 충혈돼 있었다. 홍사덕 총무와 이재오 사무총장 등 당직자들과 신경식.권철현 의원 등 李전총재의 측근들도 자리했다. 회견을 마친 李전총재는 질문을 받지 않고 바로 검찰로 향했다. 당사 1층 현관에서 기다리던 최병렬 대표와 악수를 한 그는 서둘러 승용차에 올랐다. 崔대표는 "모든 걸 각오한 것 같더라"고 했다.

◇전격 결정된 기자회견=李전총재의 회견은 14일 저녁 결정됐다. 그는 유승민 전 여의도연구소장과 이병기.이종구 전 특보 등 측근들을 집으로 불러 통보했다. 자신이 직접 쓴 회견문도 보여줬다고 한다. '내가 다 시킨 것'이라는 문구를 보고 한 측근은 눈물을 흘리며 "이것은 안 된다"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李전총재는 "내가 이렇게 해야만 문제가 풀린다"고 고집했다.

李전총재가 검찰 자진출두를 결심한 것은 SK비자금 1백억원 수수에 이어 최측근인 서정우 변호사가 삼성.LG.현대자동차 등에서 3백50억원을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더는 침묵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종구 전 특보는 "더 이상의 국정혼란이나 혼선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崔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가 '고해성사론'을 거듭 제기하며 李전총재 측의 입장 표명을 압박한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압박인가=이날 李전총재의 대국민 사과와 검찰 출두로 인해 대선자금을 둘러싼 대치정국은 새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검찰의 수사는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있다. 李전총재가 자신의 책임임을 선언하고 나서 수사에서 발뺌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와 함께 노무현 대통령도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한나라당 측은 보고 있다. 盧대통령의 '10분의 1'발언은 사실상 불법 대선자금 유입을 시인한 것인 만큼 대선자금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李전총재는 회견문에 '대리인들만 처벌받고 최종 책임자는 뒤에 숨는 풍토에서는 결코 대선자금의 어두운 과거가 청산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넣었다. 이 때문에 盧대통령을 겨냥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李전총재가 회견에서 불법 대선자금 규모를 '5백억원'가량이라고 언급한 대목과 관련, 검찰 수사에서 대규모의 추가 자금이 밝혀질 경우에는 한번 더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세전환 노리는 한나라당=한나라당은 침울한 분위기다. 홍사덕 총무는 "李전총재가 짊어진 가시짐이 훗날 다시 보면 대단히 큰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박진 대변인도 "정치개혁을 위한 살신성인의 결단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이와 함께 한나라당은 李전총재가 최종 책임자임을 자처하고 검찰에 출두함에 따라 일단 당이 대선자금 정국의 악몽을 털어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고 보는 모습이다. 盧대통령 측의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압박할 계기로 보기도 한다.

崔대표는 李전총재의 검찰 출두를 두고 "잘 한 일"이라며 "李전총재가 구속되면 盧대통령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며 盧대통령에 대한 검찰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은 "李전총재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가는 만큼 盧대통령도 당연히 검찰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 재선 의원은 "한나라당으로서는 부담을 던 부분이 있다"고 했다.

강갑생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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