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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눌린 자 보듬고, 우리 산하 헤맸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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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12면

임권택 감독이 드디어 ‘천년학’을 내놓았다. 나로서는 ‘서편제’의 자매편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가지만, 대개 임 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라는 데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지난달 29일 후배 영화인들이 헌정 행사를 연 것도 그런 관심의 표현일 것이다. ‘서편제’를 한 정점으로 하는 임 감독의 작품세계는 그가 만든 영화 편수만큼이나 다채롭지만, 일정한 흐름과 방향을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영화 인생 45년, 100번째 영화 ‘천년학’ 내놓은 임권택 감독을 위하여

‘천년학’은 14년 전 개봉한 영화 ‘서편제’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서편제’는 1993년 비평적 찬사 속에 단관 개봉으로 서울관객 100만 명을 동원한 경이적인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임권택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영화다.

‘천년학’은 ‘서편제’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속편이라기보다는 리메이크로 보인다. ‘서편제’의 주요 인물들이 그대로 나오고 이야기의 기본 틀도 그대로다. 둘 다 이청준의 ‘남도 사람’ 연작이 원작이다. 가난을 못 견뎌 가출했던 동호(조재현)는 실패한 소리꾼인 양부(養父)가 죽은 뒤, 눈먼 이복누이 송화(오정해)를 찾는다. 두 사람은 소리의 끈을 더듬으며 떠돌고, 흩어지고, 다시 만난다.

‘서편제’가 소리꾼 가족의 이산과 몰락, 동호의 가출과 귀환을 통해 전통이 패배한 세계에서 근대화의 뒤안길을 걸었다면, ‘천년학’ 역시 뒤안길을 배경으로 했으되 주안점은 개인의 사랑과 예술에 놓인다. 그런 기조로 동일한 사건도 동호의 송화에 대한 숨겨진 사랑이란 관점에서 재해석된다. ‘서편제’에서처럼 안타까운 이별보다는 운명적인 만남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만큼 임 감독의 세계관이 낙관적으로 바뀐 것일까.

‘巨人’ 임권택의 발걸음

고희(古稀)를 넘긴 채 영화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임권택(71)을 ‘국민감독’이라거나 ‘거장’이라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알맹이는 모호한 것이기 쉽다. 그러나 그가 ‘거인’인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삶의 이력이 그렇다. 그는 좌익 집안 탓에 중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가출했다. 동란 중 부산 영화판에서 잔심부름을 시작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는다. 10년 후, 26세 청년 임권택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하고, 60∼70년대 잘나가는 영화감독으로 꼽히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충무로의 최상급 상업영화 감독이었던 그가 40대 초반 존재의미를 회의한 끝에 진지한 영화세계의 탐구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영화는 남다른 이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국내외에서 성가도 높아졌다.

임권택은 또 오락과 예술을 넘나들며 어울리지 않는 두 영역을 조화시키려 했다. 진지하고 예술적인 영화를 만들면서도, 항상 대중을 넘어서기보다는 그들을 껴안으려 했다. 이런 태도는 때로 타협으로 비치기도 했다. ‘장군의 아들’ 연작(1990∼92)이나 ‘노는 계집 창’(1997), ‘하류인생’(2004) 등에서 그런 노력의 흔적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예술을 위해, 영화적 아름다움을 위해 삶을 희생하지 않았다. 꾸며진 아름다움보다는 삶의 진실함을 더 중요하게 여겨왔다. 그의 영화는 그래서 굳건히 이 땅에 발 디디면서 우리의 아픔을 구슬프고도 아름답게 기록한다. 그를 예술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예술이 삶을 초월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부둥켜안고 보듬는다는 점에서다.

‘슬픔의 행로’를 좇아서

임 감독이 자신의 영화세계를 휴머니즘으로 설명할 때, 왜 그런 상투적인 틀에 머물러 있을까 의아해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의 휴머니즘의 깊이를 뒤늦게 ‘서편제’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영화는 휴머니즘이 추상적인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돌이켜 보면 임권택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우리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근대화의 역정을 마치 활인화(活人畵)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다. 그에게 근대화의 역정은 무엇보다도 주변으로 밀려난 약한 사람들의 수난과 이산, 남북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점철된 ‘슬픔의 행로’다. 그 슬픔은 곧 억눌린 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승화된다(‘길소뜸’ 1985, ‘티켓’ 1986, ‘씨받이’ 1986, ‘아다다’ 1988, ‘개벽’ 1991, ‘서편제’, ‘노는 계집 창’). 때로는 구도의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만다라’ 1981,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 ‘개벽’, ‘서편제’, ‘취화선’ 2002), 드물지만 예술적 형식미가 앞서기도 한다(‘춘향뎐’ 2000, ‘취화선’).

임권택의 영화는 아름답다. 그가 택한 아름다움은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이다. ‘만다라’에서 만개하기 시작해 ‘서편제’에서 절정에 달한 임권택-정일성(촬영감독)식의 아름다움은 나지막한 산과 굽이굽이 휘도는 길, 햇빛 아래 드러나는 갯벌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아비어미가 헤매던 인생의 터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한 미감을 넘어 항상 우리의 공동체적 삶, 또는 역사적 삶으로 향한다.

임권택은 천재적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다. 타고난 재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실과 뚝심으로 삶을 직시하는 자세를 지켜냄으로써, 눈감거나 거기로부터 도망치지 않음으로써 그는 현재의 성취를 이뤄냈다.

우리 삶의 굽이를 지켜봐온 임권택 같은 이를 갖고 있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그러한 그를 신세대적 감각을 갖지 못했다고 타박한다면, 그것은 야박한 일일 것이다. 거인의 발걸음이 예서 멈추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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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주씨는 일간지 기자를 거쳐 미국 남가주대학(USC)에서 영화학을 공부한 뒤 영화평론가로 일하며 동아방송예술대 초빙교수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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