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감독과의 오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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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13면

몇 년 전 이야기다. 어느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감독은 십여 편의 조감독 생활을 거친 베테랑이었다. 그는 매우 늦은 나이에 데뷔하는 만큼 충무로의 오랜 낭인생활을 접고 드디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기회를 잡았다는 데 대해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소설과 천명관의 시네마노트

한 가지 문제는 차일피일 시나리오 계약이 미뤄지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영화사의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감독을 통해서만 얘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영화사의 형편은 좋지 않지만 사장의 친구 중에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는 한 친구가 이번 영화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거였다. 다만 대전시에서 진행하는 큰 행사의 이벤트 업무를 그 회사에서 맡았는데 착수금 지급이 늦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대전시청에서 결재가 나야만 시나리오 계약을 할 수 있고 나로서는 그 계약금을 받아야 밀린 방세를 내고 카드 값도 낼 수 있게 된 상황이었다. 감독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두어 달의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갔다.

그 행사가 어떤 행사였는지, 당시 대전시장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에 나는 대전시청에 대해 자주 생각했던 것 같다. 과연 보통사람들이 대전시청에 대해 얼마나 많은 걸 떠올릴 수 있을까? 그것이 대전에 있다는 것 말고는 떠올릴 게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생각할 게 없는데도 아침에 눈만 뜨면 대전시청에 대해 생각하느라 지쳐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감독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와 달리 밝은 목소리였다. 드디어 대전시청에서 결재가 났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 당장 계약을 할 것 같으니 인감도장을 챙겨서 영화사 앞에 있는 커피숍으로 오라는 거였다. 반쯤 포기하고 있던 나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감독은 흥분해서 앞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활기 있게 의견을 내놓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수시로 영화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점검하며 자신이 충무로에서 겪은 애환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깍듯하게 존댓말을 하던 그는 어느샌가 슬그머니 말을 놓고 있었다. 나도 계약만 해준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싶어 감독의 무용담에 열심히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러갔다. 우리는 여러 상황 설정과 캐릭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전화를 한 통씩 걸고 올 때마다 감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나도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게 다시 두어 시간이 흘러갔다. 대화거리는 떨어진 지 오래였고 각자 담배를 쉬지 않고 피워대 종업원이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었다. 배도 고팠다. 어느 순간, 나는 누군가 상황을 종료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나중에 다시 만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본의 아니게 상황이 조금 모호하게 됐지만 조만간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다시 깍듯한 존댓말이었다.

그것이 그 감독과의 마지막이었다. 오후에 지급하기로 한 계약금이 왜 펑크가 났는지, 대전시청에서 지급된 착수금이 왜 나에게까지 도달하지 않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나를 배웅해 주던 감독의 얼굴에 비친 미안함과 참담함, 희망이 꺾인 자의 절망 어린 표정을 아직껏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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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씨는 충무로에서 오랜 낭인생활 끝에 장편소설 ‘고래’로 등단한 뒤 소설과 연극, 영화와 드라마 등 온갖 이야기 예술에 관심이 많아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단 소설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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