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말 하다가도 새 생각 자꾸 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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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05면

막상 대통령이 되면 그 많은 연설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해낼까. “그 사람의 스타일마다 다르다”는 게 답이다. 1993년 김영삼(YS) 대통령이 청와대 입성 직후 연설참모들을 불렀다. “니들은 별로 할 일이 없을기다. 내가 다 한데이”라는 게 YS의 얘기였다.

역대 대통령 연설은

그는 원고를 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대신 초고를 올리면 검은 사인펜으로 몇 개의 단어를 원고에 크게 써놓았다고 한다. 수정본을 연설한 다음날 신문엔 YS가 추가한 단어가 대부분 제목으로 나왔다. YS는 “내가 니들보다 낫제”라며 흡족해했다. 정치적 센스는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도 아들인 현철씨 파문으로 곤혹스러웠던 1997년 이후엔 의욕을 잃어 비서진이 쓴 연설문을 그대로 읽었다고 한다.

가장 꼼꼼한 사람은 김대중(DJ) 대통령이었다. 집권 초인 1998년 3월 초 “대통령 원고를 e-메일로 쏴도 되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두 손으로 원고를 갖다 드려야지 e-메일을 ‘쏘는’ 건 불경”이라는 반론이 거세 무산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다양한 필기도구를 사용했다. 원고가 마음에 안 들면 검은 펜으로 고쳤다. 고친 내용도 못마땅하면 빨간펜으로 재수정했다. 강조할 대목은 연두색 형광펜으로 덧칠해 다시 내려온 원고는 ‘총천연색’이었다는 게 당시 참모들의 회고다. 때론 용지 전면에 ‘X’표를 하고 새로 썼다.

수정할 분량이 너무 많을 때 DJ가 개발한 교정 수단이 녹음테이프였다. 희한한 건 녹음 내용의 한 부분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도 미리 정리해 녹음한 셈이다. “대통령은 치밀히 준비한 원고를 읽는 게 예의”라는 게 DJ의 지론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참모의 원고를 그대로 읽는 ‘모범생과’였다. 하지만 외울 듯이 연습해 자기의 연설처럼 자연스러웠다는 평가다. 미국 뉴욕 순방 중 원고의 순서가 잘못된 ‘사고’가 일어났다. 하지만 거의 외운 터라 봉변을 면했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후계 콤플렉스가 있었던 그는 외부에 비칠 모습에 대해 자존심이 강했던 대통령이다.

말로 인해 숱한 논란을 낳았던 노무현 대통령(사진)은 이지원이란 온라인 보고 시스템으로 원고를 받는 첫 대통령이다. 광복절, 31절 등의 큰 행사에선 수정해 간 원고를 읽지만 다른 행사는 관련 비서실에서 ‘말씀 자료’를 제공한다.

그러나 ‘말씀 자료’를 그냥 읽는 경우는 10% 정도라는 게 참모들의 얘기다. 때론 단어만을 나열한 자신의 메모를 갖고 간다. 무엇보다 현장 분위기를 중시한다.

과학의 날 행사에서 과기 부총리가 비슷한 내용으로 인사를 하자 원고를 덮었다. 경찰의 날 행사에선 비가 쏟아지자 자료 대신 즉석연설을 했다. “친화감이 중요하지 원고를 그대로 읽는 것은 성의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석에서 “현장에선 얘기하면서도 새로운 생각이 자꾸 난다”고 했다. 논란을 빚었던 지난해 12월 민주평통 상임위 발언도 ‘말씀 자료’를 거의 참고하지 않은 경우다. 가장 자유스럽지만 설화(舌禍) 가능성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는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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