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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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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08면

덴마크 설치미술작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2006년 작 ‘헤크라의 황혼’. 마음이 황량한 날에는 고독한 사막으로, 비 갠 상쾌한 아침에는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푸른 초원으로, 사막은 이제 우리가 선택하는 기호식품 메뉴다. 컴퓨터상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사막. 끝없는 모래와 바람, 작열하는 태양, 생명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막막하고 무한한, 그저 텅 빈 공간. 인간의 극한을 경험하게 하므로 고독하지만 한없이 자유로운 그곳. 불멸의 고전인 ‘아라비아의 로렌스’나 ‘잉글리쉬 페이션트’ 같은 영화를 사막 없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사막은 인간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고 그리움을 가지게 하는, 몇 남지 않은 자연의 공간이다.

新문학기행 - 웹(World Wide Web)

사막을 소재로 한 시는 놀랍게도 이미 1920년대의 이장희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사상(沙上)’에서 “끔찍한 행렬이로다/군대도 아니오 여상(旅商)도 아니오 코끼리도 아니오/꿈같이 솟구운 피라미트 너머로/기달은 형상이 움직이도다”라고 쓴다. 물론 이 시는 실제 사막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다. 착상 또한 조그만 바닷가 한 구석에서 이루어진 공상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제 소재가 작은 바닷가 모래밭이든 거기서 바라보는 물결이든 상관없이, 이장희의 상상의 공간은 사막에 걸쳐져 있다. 군대와 여상과 코끼리,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면서 ‘끔찍한 행렬’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규모의 공간은 사막밖에 없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막은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과 자연의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복제돼 공평하게 배분된 사막

그러나 그 사막조차도! 똑같이 복제되어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윈도 화면을 열면, 불그스름한 황금빛의, 모래바람이 만들어낸 곡선의 굴곡까지도 선명한 사막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마음이 황량한 날에는 고독한 사막의 컨셉트로, 비 갠 상쾌한 아침에는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푸른 초원의 컨셉트로, 우리는 환경을 그날의 기분에 따라 설정할 수 있다. 사막은 이제 우리가 선택하는 기호식품 메뉴다. 컴퓨터상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문혜원씨는 현재 문단에서 발표되는 거의 모든 시를 누구보다 꼼꼼히 읽는 문학평론가이자 문학연구자이며 아주대 강의교수입니다. 

그 사막이 이원의 시에도 있다. 그녀의 시에서 사막은 ‘따.따.따.쩜(www.)’으로 지칭되는 웹상의 공간이다. ‘World Wide Web’은 그 이름에 걸맞게, 인터넷에 접속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자신을 열어 보인다. ‘인터넷의 바다를 유영’하는 권리는 남이 아닌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라는 이원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은 작금의 인터넷 세상을 한 구절로 요약한 시대사적인 구절이다.

현대인에게 웹은 실제의 공간보다 더 친숙하고 풍요로우며 다양하고 평등한 세상이다. 우리는 조간신문 대신 인터넷을 클릭해서 날씨와 주식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정보들을 접수한다. 메일 끝에 첨부되어온 장미꽃 선물을 받고, 신간서적과 음반을 할인된 가격에 구입한다(‘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 대부분의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웹 브라우저만 장착하면 세상이 개벽한다. 종교와 정치, 철학, 사회와 경제, 문화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웹을 장착하는 곳은 어디든지, 신전이다(‘몸이 열리고 닫힌다’). 그래서 이원은 이 무한한 웹의 공간을 ‘전자사막’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안을 돌아다니는 우리들을 ‘유목민’이라고 칭한다(‘전자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원과 함께 켜지고 꺼지는 실존

그러나 전자사막에서 자유로운 이 유목민들은 실재하는 현실세계에 노출되면 지극히 불안한 상황에 놓인다. 그들은 실재하는 육체인 두 다리가 ‘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고, 몸에 전원을 연결하고 나서야 비로소 평정 상태가 된다(‘실크 로드’). ‘나’의 실존은 전원과 함께 켜지고 꺼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원은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웹의 공간을 ‘바다를 유영하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사막을 유목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바다’가 인터넷의 무한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사막’은 그것의 비인간성과 고립성을 말하고 싶어 한다.

스스로 ‘모니터 킨트(Monitor Kind)’임을 자처하는 유형진은 이원보다는 조금 더 익숙한 혹은 조화로운 태도로 모니터 앞에 앉는다. 그녀는 한밤중에 모니터를 켜고 아이리스 꽃을 jpg.이미지로 보고 있다(‘모니터 킨트’). 휘어진 가장자리도 선명한 보라색 꽃잎이 모니터 전면을 채운다. 아마도 눈 내린 풍경이 배경이었는지, 피어난 보라색 아이리스는 실제 꽃보다도 아름답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클로즈업되어 고정된 이미지, 모니터 속 아이리스는 절정의 상태에서 멈추어 있다. 꽃은 시들지 않고, 내리는 눈도 녹지 않는다. 모든 것은 모니터 속에 있다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 다시 피어난다.

그러나 아이리스(eyeless)에는 (당연히) 눈이 없다. 모니터 속의 아이리스가 실제의 꽃이 아니듯,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 역시 현실적인 시선과는 다르다. 주어진 바 그대로 모니터 속의 이미지들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그것에는 실제의 눈이 가지고 있는 선택과 주목의 기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천만 개의 눈들이 모니터를 향한다. 그 눈들은 단지 모니터를 응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증상에 맞는 병명을 찾을 수 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교통편과 여비 없이도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을 검색한다. 네이버 지식in이나 엠파스ㆍ야후에 접속해, 원하는 단어나 문장을 쳐넣기만 하면 된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대부분의 지식은 모두 그 안에 있다. 궁금하면 인터넷에 접속하면 된다.

이러한 검색 행위는 전자사막의 유목민이 가지고 있는 정처 없는 헤맴보다 훨씬 합목적적이다.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원하는 정보를 빠른 시간 내에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는 만큼, 편리하고 실속이 있다.

검색창 속에 갇힌 모니터 킨트

문제는 검색의 결과로 주어지는 답안이 이따금 현실적인 도움이 안 되거나, 검색하는 동안 종종 우리가 길을 잃는다는 것이다. 지식 검색은 동화 ‘오즈의 마법사’의 캐릭터와 줄거리, 결말을 알려주긴 하지만, 거품을 토하며 축 늘어져 있는 토토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Somewhere Over The Rainbow’).

검색창 너머의 지식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다. 이미 연구된 것, 경험된 것, 체계화되고 결론이 난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 다르게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대해, 그것들은 답변을 줄 수 없다. 지식 검색의 창고는 결국 지금까지 인간이 축적해온 지식을 질문에 맞게 조합해서 내놓을 뿐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모니터 킨트는 검색되지 않는 답안들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나가는 문을 알고 있을까?

모니터만을 바라보는 동안, 유형진의 피터래빗은 죽었다. 고향에서의 시간을 팔다가, 추억을 불러내어 모니터 킨트의 평화로운 일상을 잠시 혼란하게 한 죄로, 유년의 시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저격을 당한 것이다(‘피터래빗 저격사건’).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유형진의 피터래빗은 종이책 속의 주인공으로서 모니터에서 벗어난 시간 영역에 있다. 그것이 피터래빗이 저격을 당한 이유다.

우리의 다음 세대도 그럴까? 아마도 그들에게 피터래빗은 모니터 속의 이미지로 존재할 것이다. 일정한 분량을 들려주고 다음 페이지를 클릭하면 책장이 넘어가는 전자책 속의 주인공 피터래빗. 유형진의 시 속에서 죽은 피터래빗은, 검색창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파란 벨벳 조끼에 장식 없는 가죽신을 신고, 조끼 주머니에 회중시계와 동그란 보안경과 담배가 들어있는 채로 모니터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피터래빗. 진정한 모니터 킨트는 그 피터래빗의 이미지와 살아갈 다음 세대다. 그들에게 웹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고, 그들 역시 유목민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들이 여전히 시를 쓴다면, 시의 공간은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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