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시민이 승리한 태국시위(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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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작년 2월 태국 쿠데타의 중심인물이었고 이번 발포명령의 장본이었던 수친다장군이 총리직을 사임하고 망명길에 나섬으로써 태국의 유혈시위는 일단 민주시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제1막이 끝났음을 의미할 뿐이다. 태국의 민주화에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있고,넘어야 할 고비가 남아있다.
우선 군사독재를 구조화시켜 놓은 헌법이 어떻게 개정되느냐 하는 문제다. 25일부터 열리는 하원에서 정당간 협의로 결정될 문제지만 그 내용이 어떻게 되느냐는 앞으로 태국의 정치안정을 가름하는 중요 관건이 될 것이다.
다음은 승계 권력주체의 문제다. 수친다는 비록 망명했지만 그를 뒤받쳐온 친군부세력이 아직도 의회와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지배세력」의 교체가 아닌 「지배인물」만의 경질로 끝난다면 태국의 민주화 폭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정치불안의 요소는 계속 남아 내연하게 될 것이다.
이번 태국사태는 최근의 경제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중산층 시민의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80년대 이후 계속돼온 이나라 경제의 고도성장으로 교육의 확대,언론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이 국민의식수준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시위대가 학생·지식인같은 과거의 민주화 선도세력뿐만 아니라 중소상공인과 젊은 샐러리맨 등 신중산층으로 확대,강화됐다는 사실은 60년간 태국을 지배해온 봉건적인 군부세력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의 태국 민주화는 이같은 기성의 범군부세력과 신생의 중산 시민세력 사이의 힘의 균형 속에서 형성돼 나갈 것이다. 이번의 헌법개정과 그에 따른 권력개편은 이 두 세력의 역관계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태국이 정치안정 속에서 민주화를 계속할 것이냐는 사회전반의 비군사화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달려있다. 지금 군부세력은 중앙의 정치기구뿐만 아니라 언론·기업·사회단체와 지방의 자치기구·문화단체까지 폭넓게 지배하고 있다.
태국의 이번 정치변혁은 유사한 정치적 시련을 겪고 있는 다수의 동남아 주변국과 그밖의 제3세계 국가들에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경제가 성장한 사회에서 군사독재는 장기간 지속되기 어렵고 국민을 살상하는 집권세력은 조만간 지배력을 상실하고야 만다는 교훈이다. 태국에 경제성장이 없었거나 18일의 유혈사태가 없었다면 수친다정권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군사 또는 민간 권위주의에 지배돼온 아시아의 민주화는 86년의 필리핀을 선두로 한국·네팔 정도에서 비교적 정체상태를 보여왔다. 이번 태국사태는 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아직도 비민주상태에 있는 동남아지역 민주화의 도미노를 가져올지가 앞으로의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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