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과거 청산' 유혈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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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발트 3국의 하나인 에스토니아에서 과거사 청산 문제로 26일부터 사흘 동안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친서방 성향의 에스토니아 정부가 수도 탈린 중심가에 서 있던 '소련 해방군 동상'을 철거하자 이에 반대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진압 경찰과 충돌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계 주민 1명이 사망하고, 150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 등 러시아 언론이 전했다. 사태는 러시아와의 외교 마찰로 비화하고 있다.

문제의 소련 해방군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에스토니아에 진주, 독일 나치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 1947년 세워졌다. 종전과 함께 소련에 강제 편입됐다 91년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소련 잔재 청산 차원에서 동상 철거를 추진해 왔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27일 새벽 높이 1.8m의 동상을 분해.철거한 뒤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옮겼다. 동시에 동상 밑에 묻혀 있던 전몰 소련군 유해 이장 작업도 추진 중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들은 "에스토니아를 나치 압제에서 구한 소련군에 대한 모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28일까지 상점 파괴와 약탈 행위를 동반한 과격 시위가 계속됐다. 경찰은 물대포와 고무총탄을 이용한 강경 진압에 나서 사흘간 800여 명을 체포했다.

러시아도 당연히 발끈하고 나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8일 "소련군 동상 철거로 야기된 사태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한다"라고 말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도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중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상원은 27일 에스토니아와의 외교관계 단절을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130만 명의 에스토니아 인구 중 약 25%가 러시아계다. 이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러시아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유럽연합(EU) 하비에르 솔라나 외교정책 대표와 미국 국무부는 "동상 철거는 에스토니아가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며 에스토니아 정부를 지지했다. 에스토니아는 2004년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하는 등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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