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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값 작품성 따라 매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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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그림 값을 크기에 따라 정하는 이른바「호당 가격제」를 거부하고 작품성에 따라 정한 전시회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열려 화랑가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오는 15일부터 30일까지 전국 4개 도시. 5개 화랑에서 동시에 열리는 서양화가 이인수씨(38)초대전은 크기에 관계없이 출품작마다 작품성에 따라 가격이 매져진다.
출품작들은 40∼1백호 크기로 작품에 따라 3백만∼7백만원 정도의 가격이 매겨지는데 작은 작품이 큰 작품에 비해 가격이 같거나 오히려 높은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 시카고의 한국 화랑인 로이드 신화랑이 기획한 이 전시회는 서울의 갤러리 미건·갤러리 포커스, 부산의 지니스 화랑, 대구의 맥향 화랑, 천안의 아라리오 화랑에서 열린다. 이 전시회에는 화가 이씨의 신작 1백12점이 화랑별로 각각20여점씩 내 걸린다.
「호당 가격제」철폐에 뜻을 같이 한 화가 이씨와 참가 화랑들은 전시회에 앞서 작품값 산정을 위한 협의를 갖고 출품작을 작품 수준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가격을 정했다. 이 과정에서 작품 크기는 완전히 배제됐다.
이 전시회는 역량 있는 한국의 젊은 화가를 해외에 진출시키기 위해 지난해 여러 차례 귀국, 젊은 화가들을 탐색해온 로이드 신화랑이 첫 화가로 이씨를 선정하고「호당 가격제」 철폐 의지를 타진한 끝에 이뤄지게 됐다.
로이드 신화랑은 국내 화가들의「호당 가격제」에 따른 작품값으론 국제 경쟁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 이씨의 작품 값을 국제무대에서와 동일하게 책정키로 합의했다. 또 이 같은 의견을 많은 화랑들에 제시했으나 대부분의 화랑들이 난색을 보여 여기에 동의하는 화랑들에서 국내전을 열기로 한 것이다.
로이드 신화랑 부사장 신성균씨(45)는『미국·유럽의 30∼40대 화가들의 일반적 작품값은 1백∼2백호 크기가 5전∼6천달러 정도인데 비해 국내 작가들의 작품 값은 대체로 너무 비싼 편이며 그것도 호당 가격으로 치면 더욱 비싸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때문에 국내 화가들이 해외로 진출하는데 큰 장애가 되고있으며 국내외 작품값이 다른「2중 가격제」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로이드 신화랑은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이씨를 앞으로 10년간 전속 계약해 국제 무대에서매년 다섯차례 정도의 개인전, 두차례 정도 국제아트 페어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이씨는 서울대·파리 고등국립 미술학교를 나와 84년께부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있는 중견화가로 몇 년 전부터 새의 이미지를 소재로 존재의 대립·화합관계를 강렬한 색채와 상징적 형상으로 표현한『둘-새들의 싸움』연작을 발표해오고 있다.
그는『작품이 크거나 작거나 작가의 정열과 노력은 마찬가지며 작은 작품이 큰 작품에 비해 뛰어난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데 큰 것이라고 비싼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우리의 실정』이라 지적하고『작가로서 작품값이 실질적으로 떨어지고 화랑·화가들의 미운 눈총을 받는 등 많은 현실적 어려움을 무릅쓰고「호당 가격제」를 무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전시회는 그림을 마치 땅을 재어 팔듯 크기에 거의 비례해 거래해온 우리 미술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호당 가격제」는 세계미술계에서 우리나라·일본밖에 없는 독특한 거래제도로 오랫동안 미술계 발전을 가로막는 고질로 지적되어왔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씨는『국내미술시장의 작품값을 합리적으로 형성해 나가는데 매우 바람직한 시도』라 평가하고『앞으로는 여기에서 더욱 발전해 작품값이 경매제도를 통해서나, 권위 있는 미술관의 구입가격에 따라 평가·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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