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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상에 오지는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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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광이 이색적이어서가 아니다. 문명의 손길이 덜 미치고 그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다. 이제는 그냥 네팔이 좋아서 찾아간다.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가가자 편안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역사든 문화사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가서기까지는 짧지 않은 세월이 걸린 셈이다. 글ㆍ사진 여동완(사진작가ㆍ출판인)


이런저런 이유로 네팔 여행을 참 많이 했다. 특히 십 수년에 걸쳐 티베트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언제나 카트만두에서 쉬었다가 서울로 돌아오곤 했다. 인도를 여행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카트만두에서 몸과 마음을 쉬었다가 돌아왔지, 인도에서 바로 서울로 온 적이 없다. 과거 수천 년 동안 인도와 티베트를 오가던 상인들이 카트만두에서 다리 쉼을 하고 여행했듯이 나도 그런 것인데, 그만큼 카트만두의 지리적 환경이 양 대륙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쉬기에 적합한 때문이다. 그래서 카트만두는 오랜 세월 문화적 접촉지대로 기능할 수 있었고, 다양한 문화가 융화되어 표출되는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게다가 ‘세계의 지붕’이라는 별칭을 가진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인 곳이지 않은가.

남부 타라이 지방. 힌드 전통에서 소는 신성하게 여기는 동물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무소를 이용해 탈곡을 한다.

나도 그런 매력에 끌려서 카트만두를 드나들다 보니 네팔에 친숙해졌고 정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곳을 칭송해 마지않는, 문명의 혜택이 덜 미치고 가난한 ‘그들을 너무 즐긴’, 개인적인 감상문이나 이미지에 동조자가 될 수는 없다. 사진가로서 비슷한 실수를 범했던 개인적인 경험상 세계에 대한 개인의 감상을 일반적인 시각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저작물에 대해서 내가 부정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사실 나에게는 네팔이 친숙해질수록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점 또한 비례해서 늘어갔기 때문이다. 이는 네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에서 비롯된 것인데, 단순히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부대낌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마땅치가 않다. 왜냐하면 나는 네팔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역사든 문화사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가서기까지는 짧지 않은 세월이 걸린 셈이다.

현대 네팔의 트라우마

얼굴에 칠을 한 전형적인 힌두 수행자. 사두의 모습.

현대 세계의 흐름에서 낙후된 네팔이 세계 주요 뉴스의 조명을 받은 때는 2001년 6월 1일 밤 네팔 나라야니티 왕궁에서 일어났던 총기 난사 사건 직후다. 사건은 디펜드라 왕세자가 친부모 비렌드라 왕과 아이슈와르야 왕비, 쉬루티 공주 등을 포함해 왕족 10명을 총으로 쏘아 죽인 뒤 본인도 자살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얼굴에 칠을 한 전형적인 힌두 수행자. 사두의 모습.

우발적 사건이든 정치적 음모든,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21세기에 역사책에서나 읽게 되는 중세적인 왕정 내 살인사건을 겪은 네팔은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사건 직후 왕위에 오른 지금의 갸넨드라 왕정에 항거하는 데모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이를 저지하는 정부군과의 충돌로 지난 5년간 무려 1만5000여 명이 죽었다. 그 과정에서 민중들의 적극적 저항에 밀린 왕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전근대적인 왕정체제로 돌아가려는 시도까지 하며 왕권을 강화했지만 의회의 모든 정치 세력까지 공세에 가담하자 결국 2006년 4월 의회민주정치를 선언했다. 그래도 네팔의 공식적인 국가 명칭은 ‘네팔 아디라즈야(Nepal Adhirajya)’, 여전히 ‘네팔 왕국’이다.

카트만두 아싼 시장. 카트만두 시민들의 생필품 시장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수많은 사람으로 종일 붐빈다.


이 시기에 표면으로 떠올라 세계 뉴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아직까지도 네팔의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는 정치 세력은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이다. 네팔 마오이스트의 반왕정 활동은 1996년 시작돼 일찍이 ‘인민정부’ 수립을 목표로 입헌군주 정부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지난 10여 년간 크고 작은 내전을 겪으며 네팔을 긴장시켜 왔다. 그러던 와중에 왕정이 위기에 빠지자 마오이스트 혁명정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존의 반대파 정당들과 연합해 전근대적인 입헌군주제를 타파하는 데 앞장섰고, 지금의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견인차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방식은 필요하면 경찰을 인질로 잡고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등 너무 과격하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약탈을 일삼고 있다는 불미스러운 루머가 공공연하게 퍼지기 시작하자 그동안 마오이스트를 지지하던 네팔 지식인들도 모두 돌아섰다.

네팔 마오이스트의 정치화

게다가 이즈음 미국이 네팔 사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네팔 마오이스트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새 민주정부에 무기는 물론 수백만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새 정부의 움직임에 마오이스트는 즉각 적대관계로 다시 돌아서고 또다시 내전에 돌입할 위기에 처했으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동안의 내전으로 나라가 파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관광산업이 네팔의 주 산업인데,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자 관광업에 종사하던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그와 관련된 산업이 위축되니 나라가 마비상태에 빠졌다. 사태가 이러하니 정부와 마오이스트 혁명정부는 평화협정을 맺고 대화로써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일단 네팔은 평온을 되찾았고 사람들은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으며 관광객들은 다시 네팔을 찾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에 찾은 카트만두는 5년 동안이나 내전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흔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다시 활기를 찾고 있는 분위기였다. 카트만두 관광의 역사와 함께 전통을 자랑하는 게스트하우스나 식당들도 여전해 보였고, 내가 아는 몇몇 친구들은 사업적으로 더욱 성공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 좀 나아지고 있다고 한결같이 말할 뿐이다. 이러한 나의 의문은 오랜 세월 가깝게 알고 지내던 네팔 친구들을 통해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외국으로 돈을 벌러 나간 네팔 사람들이 보내오는 돈이 한 해에 6억5000만 달러나 된다는 것인데, 현재 관광산업으로 벌어들이는 돈보다도 많은 금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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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할 만큼 늘 어디론가 떠나려는 몸짓으로 서성이는 여동완씨는 사진집 『티벳 속으로』와 전문서 『커피』를 낸 사진가이자 가각본 출판사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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