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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하의자동차문화읽기] 밥은 비벼도 차는 비비지 말라?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현대자동차는 2001년 출시했던 5도어 해치백 라비타를 단종했다. 수출은 잘됐지만 내수 판매가 부진했던 결과다. 시장에서 실패한 모델이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내심 라비타의 선전을 고대했던 터라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 차는 1990년대 세계적으로 불어 닥쳤던 레저용 차량(RV)의 인기에 이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세단과 RV의 특징을 합친 크로스오버차량(CUV)이다. 당시 상대적으로 RV에서 열세였던 현대차가 절치부심해 내놓은 것이었다.

 이탈리아 유명 디자인 하우스인 피닌파리나가 손을 봐 작은 차체에 넓은 실내공간이라는 소형 크로스오버 차량의 기본 컨셉트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스타일도 무난해 데뷔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차 길이는 4m를 조금 넘어 같은 차체를 사용한 아반떼보다 50cm짧았지만, 차 높이와 폭이 커서 공간의 쓰임새가 좋았고, 중저속에서 주행 안정성이 좋았다. 일상 생활과 레저용으로 모두 괜찮은 차였다. 내수판매 목표는 연 4만 대였다. 그러나 2002년 1만 대를 겨우 넘게 팔았을 뿐, 매년 판매량이 급감해 지난해 387대만이 팔렸다.

 왜 라비타가 이 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됐을까. CUV는 통상 같은 플랫폼을 사용한 승용차보다 더 비싼데 라비타는 아반떼보다 100만원 정도 쌌다. 일부에서는 라비타 엔진(1.5ℓ) 힘이 달려 초기 가속과 언덕길 등판 능력이 떨어지고, 차체가 높아 코너링할 때 불안정해 인기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또 2000년대 이후 중형차가 인기가 있어 피해를 봤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정서상 CUV를 받아들이지 못해 실패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지적으로 보인다. 한국인은 애매모호한 것을 싫어하고 솔직한 표현을 더 좋아한다. 이 때문에 승용차는 승용차답게, RV면 RV답게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니다. 제대로 만들어진 코걸이와 귀걸이를 따로 사는 셈이다. 급성장한 수입차 시장에서도 CUV는 저조하다. 크라이슬러 퍼시피카, 캐딜락 SRX, 포드 프리스타일 등이 그렇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과도한 세단 선호다. 국내 승용차 시장은 4도어 세단의 지위가 압도적이다. 3도어, 5도어 해치백이나 왜건 수요는 극히 미미하다. 수입차 역시 4도어 세단이 주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업체들은 승용차를 개발할 때 세단 이외의 가지치기 모델을 만들지 않는다. 이번 서울모터쇼에 나온 기아차의 5도어 해치백 씨드는 아예 해외 시장용으로만 판매한다.

 지금 자동차는 단순한 운반 매개체가 아니라 디자인·색상을 통해 운전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다. 그럼에도 무난한 세단만 즐겨 탄다는 점은 현재 우리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한지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편중된 수요가 문화적 특질이라기보다는 미성숙한 자동차문화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자동차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120여 년간의 진화를 통해 운전자의 용도와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발전해 왔다. 짐을 많이 싣고 다니지만 편안한 승차감을 원하는 운전자를 위해 왜건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아기가 있는 부부는 외출할 때 짐이 많다. 이럴 때 라비타 같은 해치백이 세단보다 얼마나 더 편리한지는 한 번만 나갔다 와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용성이 최대 구매 포인트가 되어야 할 소형차에도 해치백보다 세단이 압도적이다. 세단이 더 높은 사회적 신분을 보여준다는 생각에서다. 이젠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바라본다. 자동차를 보는 시각도 달라질 때다.

황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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