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작은 영어시험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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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9학년도부터 외국어고 입시 전형에 토플이 제외된다. 토종시험이 대안인 듯하다. 예전에도 토플.토익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이번은 분위기가 다르다. 이제 더 이상의 대란은 없을까? 영어시험을 기획 설계하고 영어 평가 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해 본다.

우선 시험은 더 이상 흔들지 않아야 한다. 토플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간단한 영어시험도 목적에 따라 타당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하물며 토플.토익은 효용가치도 높고 잘 만든 영어시험이다. 우린 이러한 시험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던 기업과 학교의 무지나 횡포에 주목해야 한다. 업무 담당자는 행정편의적으로 토플.토익 성적을 요구하지 않았는지, 혹은 시험의 목적이 아닌 시험 자체에 타당성을 부여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시험은 시험을 쉽게 대체하지 못한다. 시험의 각기 다른 필요와 목적에 대해 건강한 의식이 없다면 토플.토익을 퇴출시켜도 또 다른 공룡이 시장에 등장할 뿐이다. 그 시험은 이전 공룡이 가지고 있는 역기능을 그대로 승계할 것이다. 대란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토종 시험과 외국산 시험을 맞붙이는 대립 구도도 신중해야 한다. 누구든 당장에 토플 같은 시험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시행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말아야 한다. 평가기관의 전문성과 윤리의식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저가의 외국산이 품질적인 측면에서 더 좋다면 국산 제품에 마음 붙이기가 어렵다. 애국심에 호소하며 토종시험 알리기도 한계가 있다. 시험은 약속인데 토종 영어시험 정보는 대부분 제한적이다. 연구개발 논문 하나 변변히 찾아보기 힘들며, 영어 평가 전공자 한 명 배치되지 않은 채 국가공인.국제공인이란 간판이 걸려 있기도 하다. 국제공인이란 의미는 참 모호하며, 국가공인도 전문가 집단에 의해 엄정하게 심사됐는지 궁금하다.

이처럼 행정편의적 발상으로 토플과 토익 성적이 요구되지 말아야 하고, 국내 영어 평가기관들은 경험과 전문성이 부족하다면 당장에는 어떤 묘안이 있을까? 공신력 있는 국가 차원의 시험 개발과 시행에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의 시장 구도는 한동안 유지돼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혜안은 영어시험을 서둘러 분화하는 것이다.

토종시험을 보면 필요에 민감하지 못하고 그저 비슷한 모양이다. 이럴 때 작은 규모의 특수목적형 시험을 개발해 시행하면 공룡시험의 거품이 빠질 수 있고 토종시험의 시장이 차별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 표준의 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오랜 기간 교육시장을 지배해 온 큰 시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시험이 필요한 곳도 참 많다. 영어수업.관광.무역 등 다양한 영어 사용 환경에서 영어능력을 세부적으로 모형화해 목적형 시험을 만들어 사용하는 평가문화가 시작돼야 한다.

크고 작은 영어시험을 기획하고 개발할 수 있는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은 많아도 시험을 필요와 환경에 따라 개발해 줄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영어교사에 관한 계획은 많지만 영어시험 전문가 교육과정은 없다. 교육부도 영어시험이란 눈에 보이는 결과물에만 연연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반드시 사람을 키워야 한다. 시험을 직접 만드는 인력 네트워크가 없다면 공룡시험의 세상은 없어지지 않는다.

'영어들'의 시대다. 이제 '영어시험들'의 시대가 시작돼야 한다. 그 영어시험들을 우리가 직접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오늘이라도 영어시험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는 부서장들은 자신의 조직에서 필요한 영어능력이 무엇인지 마라톤 회의를 소집해야 한다. 직접 제작하든 외부에서 가져오든 필요한 영어시험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평가 책임자에게 물어보고 따지고 압박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또 하나의 시험 공룡이 또 다른 대란을 일으킬 것이다.

신동일 영어평가설계사·중앙대 영어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