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앞 못 보는 누이 요모조모 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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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요즘이야 외국인도 한옥에 사는 것을 자랑하곤 하지만, 어렸을 적 제가 한옥에 살아본 느낌은 달랐습니다. 겨울에 추웠던 기억부터 납니다. 단열과 난방이 지금만큼 좋던 시절도 아니었던 데다, 마루가 마당을 향해 열려 있는 구조라서 더 그랬지요. 부엌도 꽤 불편했습니다. 방이나 마루에서 부엌으로 가려면 신발을 신어야 했지요. 더구나 아궁이의 위치가 낮아서 불 위에 올려놓은 음식을 손보려면 당연히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여러 모로 주부에게는 퍽 가혹한 조건이었습니다.

영화 '천년학'(상영 중)에는 인상적인 집 한 채가 나옵니다. 주인공 동호가 중동 건설현장에서 벌어온 돈으로 평생의 연인 송화를 위해 짓는 집이지요. 새로 짓는 집인데도, 동호는 고택(古宅)을 헐면서 나온 자재를 가져다가 집을 짓습니다. 마구잡이로 짓는 집장사의 집보다 나무가 훨씬 좋다는 거죠.

그렇게 완성된 집의 겉모습은 한옥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요모조모 배려가 대단합니다. 앞 못 보는 누이를 위해 대문부터 현관까지 바닥에 맷돌을 박아 길을 안내하고, 복도의 폭도 손을 벌리면 안심하고 벽을 짚을 만하게 했습니다. 또 그렇게 손을 짚는 자리는 방방마다 무늬를 달리해 구별할 수 있게 했고요.

널찍한 소리 공부방, 혹시 몰라 큼직한 거울을 걸어놓은 안방, 그리고 부엌에 이르기까지 동호의 설명대로 카메라가 훑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게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이전까지 좀처럼 살뜰하게 애정을 표현할 줄 모르던 동호의 마음이 이 집 한 채로 고스란히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 마음을 확인하고 동호의 또 다른 여자 단심이 쓰러지듯 주저앉는 모습 역시 애절하더군요. 제작진에게 들으니 전남 진도에 지은 세트라고 합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제 눈에는 세월을 아는 목수가 지은 집처럼 보였습니다. 한여름의 비바람과 땡볕, 한겨울의 얼음과 혹한을 두루 겪은 나무의 옹이와 결을 탓하는 대신 고스란히 기둥과 장식에 살려낸 집이지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런 집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오래도록 느껴지곤 합니다.

이 집에 젊은 관객들의 관심과 반응이 열광적이지 않은 것은 짐작 못 할 일은 아닙니다. 아마도 10년쯤 전이라면, 저도 그랬을지 모르겠습니다. 인테리어가 얼마나 감각적인지부터 따졌을 테니까요(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집값이 얼마나 오를지 보는 눈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0편째라고 느닷없이 다른 사람이 될 순 없는 일"이라면서, "그러면 나이 벡인(밴) 영화를 찍자"고 마음먹었다고요. 시사회 전에 인터뷰를 한 터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말이 참으로 적확하다 싶었습니다. 흔히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합니다만, 이 경우는 '인테리어를 보지 말고 집을 보라'가 되겠군요.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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