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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기업의 '쌩얼'을 확인하고 싶습니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말부터 자금난에 빠진 휴대전화 제조업체 P사의 운명에 관해서는 여전히 전망이 엇갈린다.하지만 여러 대기업에서 자금 담당 간부를 지낸 기업재무 평론가 김건씨(56)는 같은해 10월, 이 회사에 대해 일찌감치'회생이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를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동호회 '엉터리 경제 뒤집어 보기' 게시판에 공개했다. 분식회계 수법에 밝아 기업 등을 상대로 강의도 하는 그는, 당시 이 회사의 회계 투명성과 부실 징후에 대해 A에서 G등급까지의 순위 중 사실상'낙제점'인 F 등급을 매겼다. 그가 개발해 특허 출원중인 '기업 회계의 투명성과 부실 징후를 분석.평가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이 프로그램상 F등급은 한마디로'요주의 회사'다. 회계 투명성 지극히 낮고 부실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는 회사나 혹은 각별히 유의해서 투자해야 할 회사에만 F등급이 매겨지기 때문. 결국 이 두 회사 모두 이달 12일 전액 자본잠식으로 상장 폐지됐다.

부실 징후가 뚜렷한 기업에 대해서만 이 프로그램이 위력적인 것은 아니다.

국내 굴지의 제조업체인 H사만 해도 전통적인 재무 분석 기법 하에서는 재무 건전성이 아주 양호하다.하지만 그의 프로그램 분석에 따르면 A에서 G까지의 등급 중 가운데인 D등급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D 등급은 '회계 투명성이 높지 않으나 세심한 분석을 거쳐 투자 적정성 여부를 검토할 수 있는 단계'에 속한다.그는 겉보기엔 초일류 기업이라도 상당수가 이처럼 낙제점을 받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는 25년간 기업의 자금을 관리하는 일을 하면서, 이런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상장 기업의 공시 자료를 감리하는 금융 감독당국이나, 투자자와 채권자들에게 신용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신용 평가사들은 오랫동안 분식회계를 자동으로 검색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고심해 왔다.

하지만 이들이 내놓은 프로그램은 아직까지는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김씨는 금융 감독당국이나 신용 평가사의 이런 노력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한다. 실무 경험 없이 기계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분식회계의 전모를 파악하려면 나처럼 대기업에서 자금 관련 업무를 최소한 10년 이상은 해본 실무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대우와 진로 등 재벌 그룹 계열사에서 자금 담당 간부직을 거쳤다. 그는 그 후 여러 부실 기업 인수 과정에서 분식 회계를 밝혀내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지난해 초 '엉터리 재무제표 뒤집어 보기'를 출간했다.

김씨는 "기업의 분식회계가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상황에서는, 재무제표의 숫자가 믿을 만하다는 전제하에서 이뤄지는 전통적인 재무 분석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우량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던 회사가 몇 개월 만에 도산하고, 투자자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는 예가 허다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식회계의 가능성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재무제표 계정과목간의 상관관계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분식 회계를 저지를 경우 어떤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다른 면에서는 아주 낮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25년간의 체험과 141가지 분식회계 수법을 녹여냈다. 김씨는 "이 프로그램은 매출이 투명한가, 장부 외의 부채는 없는가, 매출채권이 적정한가 등 기존 재무분석이나 분식회계 검색 프로그램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사업화는 중단된 상태.재원도 부족하지만 누구도 이런 프로그램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난관이다.

자산이나 매출은 부풀리고 부채나 비용은 줄이고 싶어 하는 기업과 기업인들도 그렇지만 그런 기업에 투자하는 투자자들도 반기는 기색만은 아니다. 김씨는 "유명 연예인의 화장 안한 얼굴 사진을 공개하는 데 대해서는, 유명 연예인과 그 팬들 모두 반기지 않는 법"이라며 웃는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우리 경제의 주축인 기업들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웃어 넘길 일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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