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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총리임명 대통령직 대행케" 종신집권 위한 연막 술로 보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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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대통령은 아침 일찍 지만 군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선우 비서관과 차 한잔을 나누고는 『바닷가로 산책이나 나가자』고 했다. 『금방 다녀오지 않으셨습니까』고 의아해 하자 그래도 갔다 오자고 했다. 선우 비서관은 대통령이 청와대에서도 비밀얘기를 할 때는 도청을 염려해 경내 뜰을 거닐며 말을 했다는 점을 상기했다.
『자네는 이제 국회에 나가서 아무 활동을 안 해도 좋아』
선우씨는 당시 공보비서관직을 마감하고 대통령의 배려로 3기유정회의원(10대국회)에 선출된 직후였다. 박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청와대 도청 신경 써>
『이건 나 혼자 결정한 비밀사항인데, 나는 81년 10월 그만 둘 생각이야. 81년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한 뒤 그 자리에서 하야성명을 내겠어. 그러면 김일성이도 남침 못 할거야. 자네는 의원활동을 안 해도 좋으니 지금부터 간결하고 요령 있는 하야성명을 준비해이 선우 비서관은 친형 선우휘씨 (소설가·86년 타계)처럼 두주부사의 호주가로 박대통령과 숱한 술자리를 함께 한 처지였지만 이날만은 숨이 막히는 듯한 긴장을 느껐다.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이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던 핵 개발이 81년 봄에는 일단 완성되게끔 돼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박대통령은 그해 국군의 날에 한해서 핵 보유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퇴임 선언을 할 작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 분은 말년에 긴급조치에 의존하는 식의 강압통치를 마땅치 않아 했어요.. 여하튼 나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채 대통령의 그날 지시를 염두에 두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나 혼자만 알고있는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건 아니었더군요』
10·26 사건으로 하야고, 퇴임이고 「만사휴의」가 된 다음날(79년10월27일) 선우 의원은 청와대 빈소에서 박진환 씨(당시 청와대 경제담당특보· 현 농협전문대학장)의 한탄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박 특보가 각하께서 얼마 전 술자리에서. 내후년 국군의 날에는 물러나 야인으로 돌아가겠다」셨는데…』라며 몹시 안타까워하더라는 것이었다. 물론 핵 개발 완료 등구체적 내용은 박 특보의 말에 없었다 (이에 대해 박전 특보는 『국군의 날에 하야성명을 낸다는 말씀은 들은 기억이 나지만 당시 분위기로 볼 때 설마 하고 농담으로 넘겨 버렸던 것 같다』고 밝혔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을 비롯한 당시 칭와대 비서진은 또 78년에 시작된 유신헌법 개정작업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당연히 극도의 보안 속에서였다. 나라 안팎의 정세로 보아 개헌의「개」자만 흘러 나와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시골가 농사나…·">
박대통령을 제외하고 이 작업에 참여한 인사는 김 비서실장과 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 안치정 비서관 (90년 타계) 그리고 신직수 전 정보부장, 김기춘 검사(현 법무장관)정도였다. 이중 신·김 두 율사는 79년이 되자마자 각각 대통령법률담당특보·법률 비서관으로 임명받고 청와대 집무실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극소수만 관련된 작업인 만큼 회의를 하거나 문서 결재가 오갈 사안이 아니었지만 78년 하반기에는 1차 개정시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고 한다. 연구는 이듬해 10·26때까지 계속됐다.
김정렴 전 실장의 증언.
『박대통령은 후계자로 김종필 씨 (현 민자당 최고위원)를 꼽고 있었습니다. 나와 유혁인 수석은 각하로부터 두 번이나 직접 그 말씀을 들었어요. 대통령 임기가 1년 정도 남은 시점에서 김종필 씨틀 국무총리로 임명한 뒤 전격적으로 자리를 물러나면 김씨가 자동적으로 대통령대행이 되지요. 그런 다음 김총리가 대권후보가 되어 선거에 나선다는 게 박대통령의 계획이었습니다』
김전 실장은 『대통령은 「퇴임하면 시골에 내려가 나무를 심겠다. 아들 딸 시집·장가도 보내고…」 라고 말하곤 했다』며 맡을 이었다.
『78년의 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박대통령은 「선거에 한 명만 나오는 건 아무래도 안되겠다. 찬반토론도 금지했으니 사실상 추대 아니냐. 야당소속 대통령후보도 출마하고, 통대 의원들이 여건 야건 지지하는 후보를 밝힌 상태에서 선출하도록 법을 바꾸자」며 방법을 강구해 보라고 지시하셨어요. 측근들이 반대했지요.
시간이 촉박했을 뿐더러 선거관련법을 바꾸는 것은 유신헌법 자체의 개정문제로 직결돼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종전법규대로 선거를 치러야 했습니다』 김종필씨가 박대통령의 후계자였다는 데는 선우련 전 의원도 동감이다. 『어느 날 대통령께서 술자리에서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밉고 곱고 따질게 있느냐. 내 뒤를 이을 사람은 세상이 추측하는 대로다. 그 추측대로 갈 것이다」는 말이었어요. 후계자는 JP였습니다』
박대통령의 장녀 근혜 씨는 최근 『아버님은 최규하 전 총리를 후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김전 실장은『큰따님께서 모르시는 부분도 있을 것』 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부정했다.

<최 전 총리도 거론>
한가지 남는 의문이 있다. 김전 실장의 증언대로라면 대통령의 9대 임기만료일 (84년 말) 의 1년 전, 즉 83년이 퇴임시기가 된다. 선우 전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3기유정회 임기만료(82년 초) 1년 전인 81년이 된다 (대통령의 측근이던 다른 한 인사는 이 주장에 동조했다).또 그도 저도 아닌 종신집권을 염두에 둔 연막작전으로 깎아 내릴 수도 있다. 박대통령은 이미 생존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타이밍이 문제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늦었습니다』
박대통령의 주변 인물이었던 이들은 지금도 짙은 회한을 털어놓지만 70년대 후반 우리 역사의 흐름은 이미 유신체제의 편이 아니었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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