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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액스' 치밀한 단독 범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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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도발적인 눈매의 조승희에겐 항상 증오와 집요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와 얘기할 땐 내 안전이 걱정될 정도였다."

2005년 가을 버지니아공대에서 조씨를 포함한 영문과 학생들에게 창작을 가르쳤던 루신다 로이(여) 강사는 17일 ABC 방송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이는 경찰에게 조씨의 위험성을 알렸으나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밝혔다. 경찰이 그런 조씨를 방치한 지 1년6개월쯤 지난 16일 그는 기어코 총기 난사 사건을 저질렀다.

◆ 오랫동안 키워온 증오가 참극 불러=조씨는 기숙사에서 자신이 따라다닌 것으로 알려진 에밀리 제인 힐셔(18.수의학과) 등 2명을 총으로 살해한 뒤 기숙사 방에서 더 큰 일을 벌일 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팔에 붉은 잉크로 '이스마일 도끼(Ismail Ax)'라고 썼다. 그리고 그 말뜻 그대로 '분노의 도끼'를 마구 휘둘렀다. 그는 오전 9시45분쯤 공학관 강의실에 나타나 100여 발의 총탄을 난사해 사람들을 살상했다.

그건 우울증으로 오랜 외톨이 생활을 하면서 쌓인 세상에 대한 비이성적인 증오와 분노를 표출해 다중살인을 결단하게 된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의 노트에 '부잣집 아이들' '사기꾼 돌팔이' 등 적개심 가득한 단어가 적혀 있는 건 그의 의식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여성과 사회에 대한 비뚤어진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학생을 스토킹하다 체포된 전력이 있을 정도로 집요한 성격을 지닌 조씨의 이상한 집념과 열정이 세상에 대한 증오와 결합하면서 참극의 핵폭발을 일으킨 셈이다.

◆ 권총부터 쇠사슬까지 준비=조씨는 '분노의 도끼'를 수주 전부터 치밀하게 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저히 준비된 '계획 범죄'를 상상하다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다.

이는 한 달에 걸쳐 두 자루의 권총과 다량의 실탄을 구입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는 지난달 13일 처음 권총을 샀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뒤 권총 한 자루를 더 샀다. 한 사람에게 한 달에 한 자루만 판매하게 돼 있는 버지니아주 총기법에 저촉돼 미리 적발되지 않게 한 것이다. 범행을 오랫동안 계획했고, 대량 살상을 하기로 작정했다는 얘기다. 그는 범행 당일 학교 온라인 포럼에 "오늘 사람을 죽일 생각"이라는 글까지 올렸다는 게 LA 타임스의 보도다.

조씨는 공학관으로 가기 전 방에서 쇠사슬을 챙겼다. 그걸로 공학관 출입구 안쪽의 문고리를 묶었다. 밖에서 쉽게 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계획과 준비가 철저했다. 문을 잠가 놓은 그는 안에서 교실 네 군데를 돌면서 학생과 교수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사망자가 32명이나 된 건 조씨가 한 사람당 적어도 세 발 이상을 쐈기 때문이라고 수사 관계자는 말했다.

◆ 치밀하게 추진한 범죄=조씨는 다중살인을 결단하고 세부 계획을 세운 뒤 실행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 당국은 한 달 전부터 두 차례에 걸쳐 폭파 협박을 받았는데, 경비 태세를 미리 알아보려는 의도에서 그가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가 16일 오전 7시15분쯤 힐셔와 다른 학생 한 명을 사살한 뒤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가 '너 때문에 이 일을 저질렀다'는 메모를 남긴 것 역시 처음부터 살인을 하기로 맘먹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너'란 말이 최근 남자친구를 새로 사귀었다는 힐셔를 지칭한다는 게 많은 미국 언론의 보도다. 그러나 CNN은 "짝사랑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잘못된 결단의 배경을 조씨의 그릇된 정신세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토머스 제퍼슨 대학의 닐 케이(정신분석학) 교수는 "대량 살상범은 늘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므로 화가 나 있다"며 "그런 사람은 여성에게 거부당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내면에 분노와 적대감을 축적하면서 언젠가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환상을 키운다"고 말했다. 조씨의 범행도 그런 환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서울=최지영 기자

◆ 이스마일의 도끼(Ismail Ax)=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믿음의 아들' 아브라함이 하녀 하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일이다. 이스마일은 나중에 태어난 동생 이삭을 괴롭히다 쫓겨난다. 그래서 이 이름은 방랑자.추방자.망명자란 의미로도 쓰인다. 무슬림(이슬람 교도)은 이스마일을 조상으로 여긴다. 따라서 '이스마일의 도끼'는 '분노의 도끼''방랑자의 도끼''신의 처벌' 등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조씨가 영문학을 전공해 이러한 문학적 해석이 가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제임스 페니모어의 소설 '대평원'에 나오는 주인공 이스마일 부시가 가진 파괴와 창조적 힘의 상징이라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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