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부터 중수 국산화" 계획 세워|10.26으로 핵 독자 개발 끝내 무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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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78년 당시 오원철 수석은 왜 국내 우라늄 자원을 일단 그냥 묻어 두려 했을까.
70년대 초·중반에 걸친 다각도의 핵 개발 노력이 미국의 압력으로 벽에 부닥치자 박 대통령은 비밀리에 캐나다의 기술 협력을 받아 9백메가와트 급 캔두 형 중수로 4기를 건설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계획은『한-가 합작 연구(KOREA JOINT STUDY)로 9백메가와트 원자로 4기를 짓는다』는 뜻에서「KC-49사업」으로 불렸다.

<국내 우라늄 아끼자>
앞서 설명한 것처럼 중수원자로는 경수원자로와 달라 천연 우라늄을 농축·재 변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연료로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몇몇 선진국들만이 쉬쉬하며 보유하고 있는 농축 기술에 찍소리 못하고 의존해야 하는 부담이 없어지는 것이다. 별도의 연구용 원자로와 재처리 기술만 확보되면 핵 폭탄 제조용 플투토늄을 입수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마치 우박 퍼부어지듯 하던 핵 보유국들의 압력을 의식해 가며 집요하게 핵 개발을 추진한 것이다.
▲기본 정책=해외 우라늄 자원의 수입 활용을 우선하고 국내 우라늄 지하 자원은 가능한 한 보존하기로 함. 단 ⓛ인산 추출 우라늄은 적극 활용하며 ②우라늄 탐사 사업 촉진과 채광·정련 및 가공 기술 개발 등 하시라 도 국내 우라늄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태세는 완비함」.
취재 중 한 관련자로부터 입수한 박정희 시대의 비밀 문서(78년 6월 작성)는 해외 우라늄 자원 확보, 국내 우라늄 매장량 추정, 국제 시장에서의 가격 동향 등을 종합하면서 「중수원자로 6기에 소요되는 우라늄 소요량을 서기 2000년까지 충족시킬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국내 우라늄 자원은 1983년부터 86년까지 4년에 걸쳐 채광·선광을 하도록 되어 있다.
핵 개발을 계속하면 우라늄 공급을 끊어 버리겠다는 미국의 협박에 시달렸던 박 대통령으로서는 이 같은 치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하다. 인 광석에서 우라늄을 빼내는 기술(인산 추출 우라늄)의 경우 다음해인 79년 7월 KIST와 영남화학이 공동 연구를 통해 개발에 성공한다.
이 문서는 또 중수로의 냉각 재인 중수를 1985년부터는 국산화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78∼81년까지 중수 제조법을 실험 연구·개발하고, 82∼84년 사이에 시험 공장을 건설하며, 85년부터 연산40t 규모로 국산 중수를 생산하되 점차 생산량을 늘린다는 것으로「핵 자립」을 향한 야 심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비록 처음에는 캐나다의 기술에 의존해 중수로 4기를 건설하는 계획이었지만 81년(50%), 86년(85%), 91년(90%)이라는 식으로 원자로 건설에 따른 기술·시설을 단계적으로 국산화한다는 계획 역시 세워져 있었다. 관련 기자재를 국산화하는 대목에서는 기아기공·대한중기·삼성정밀·금성정밀·현대 양행·효성중공업·강원산업·동명산업·대동 공업 등 내노라 하는 국내 산업체들이 망라돼 있었다. 계획의 총책임자는 국무 총리로 되어 있었지만 이 문서의 입안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박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작업』이라며『당시 핵 개발은 대통령이 수시로 챙겼고, 그의 추진력 덕분에 그같이 엄청나고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79년의 10·26으로 태동 단계에서 꺾이고 만다. 박 대통령의 비호 아래 방위 산업에 매달렸던 수많은 인력은 이 시점을 전후해 대학으로, 개인 사업체로, 심지어는 전공과 아무 관계없는 보험 회사 직원이나 실업자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연구 개발의 맥은 한동안 정지 상태를 면치 못하게 된다.
국방 과학 연구소의 경우 3천여 명에 이르던 인력중 근 1천여 명이 연구소를 떠나고 특히 미사일 개발에 관여했던 이들은『모조리 쫓겨났다』고 한 과학자는 안타깝게 회고했다. 그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미사일 관련자 해직>
『79년 봄이었습니다. 국방장관(노재현)이 급히 나를 찾더군요. 당시 우리는 영국 페란티 사로부터 미사일에 쓰이는 관성 유도 장치 제조 기술의 도입 작업을 거의 마무리한 시점이었어요. 미국에는 비밀로 하고 추진했던 사업이었지요. 장관의 말이「지금 미국 대사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청와대로 항의하러 갔다. 큰일 났다」는 거예요.「이미 기술 도입이 끝난 일이고 나는 기술자에 불과하니 위에서 알아서 해 달라」고 답변했지요. 얼마 후 미국 대사와 주한미군 고위 관계자가 연구소(대전) 까지 찾아와 해당 시설을 보여 달라고 해요. 구경을 시켜 주었더니 심각한 표정이 되면서「앞으로 CIA 요원 2명을 이 연구소에 상주시키겠다」는 거예요. 그것만은 안 된다고 거절했는데 그 후로도 계속 압력이 들어왔어요. 미국에서 국방 차관이 왔다 가기도 했을 정도였지요. 아시다시피 당시 관성 유도 장치는 미사일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장치 아니었습니까. 몇 달 승강이하는데 한번은 또 「이왕 너희 손에 기술이 넘어갔으니 이제부터 그 관리만큼은 우리 미국이 담당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요구라 설왕설래는 계속됐지요. 그러다가 10·26이 터졌고, 나는 새 정 측의 종용으로 곧 연구소를 나와야 했습니다.』

<계속되는 미 감시>
박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핵 개발은 사실상 끝났다.
91년11월8일 노태우 대통령은「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2항에는「…핵연료 재처리 시설 및 핵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우리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부는 이것이 북한으로 하여금 국제 핵사찰을 받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즉각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이 비핵화 선언은 미국이 북한의 핵 개발 포기를 종용한다는 명문으로 우리 정부에 집요하게 요구한 핵 기술 개발 중지 요청을 청와대측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미국은 북한에 핵사찰을 수용토록 압력을 넣을 명분을 얻은 동시에 그토록 의심해 오던 남한의 핵 개발 가능성도 봉쇄한 것이다. 미국으로 치 면 일석이조였다.
노 대통령의「비핵화 선언」은「핵 주권 포기 선언」이었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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