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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푸는 역시 <15> 조선시대의 '공무원 고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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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선시대에도 공무원들의 근무 성적을 매기고 이를 인사관리에 반영하는 제도가 있었다. 오늘날 쓰는 용어와 같은 고과법(考課法)이 그것이다.

고과법은 고려 성종 8년(989년) 처음 실시돼 조선으로 이어졌다. 주로 근무 일수를 따지거나 근무 성적을 상.중.하로 매겨 인사관리에 반영하는 시스템이었다. 요즘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고과와 포폄의 두 항목으로 관리들을 평가하도록 했다. 고과는 관리의 일반 근무 동향을 기록하는 것이고, 포폄은 정기적인 근무성적 평정(評定)제도였다. 전자는 이조에 속한 고공사(考功司)에서 했고, 후자는 직속상관이 평가했다. 예컨대 한양의 관리들은 소속 관아의 상관이 포폄을 했고, 지방의 수령은 관찰사(오늘날 도지사)가 성적을 매긴다. 이같은 포폄은 이조에 통보되어 고과와 함께 인사 관리의 자료로 활용됐다.

조선시대에는 지방관을 목민관이라 하여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민생과 직결된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수령에게는 고과의 잣대가 되는 7개 기준이 있었다. 농지 개간, 호구(인구) 증식, 부역(노동력 제공) 균등, 소송 신속처리, 군정(軍政) 정비, 향교 진흥, 예절 보급 등이다. 이를 '수령7사'(守令七事)라 불렀다.

수령으로 나가면 임기 5년 동안 열 번의 포폄 성적이 매겨지는데, 모두 상(上)을 받은 자는 승진, 두 번 중(中)을 받은 자는 녹봉 없이 근무해야 하는 무록관으로 좌천, 세 번 중(中)을 받으면 파직이었다. 당상관 수령은 한 번이라도 중을 받으면 바로 파직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이 같은 평가의 엄격성은 퇴색됐고 공정성 문제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고과에도 예외가 있었다. 사헌부.사간원.세자시강원 관원들은 근무평정을 받지 않았다. 그래야만 왕에게 직간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제도들이 조선왕조를 500년이나 이어가게 한 힘은 아니었을까.

박홍갑(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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