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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출구 막힌 이상한 선거/전육(유세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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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도권과 충청권이 이번 총선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1노 3김의 지역분할을 배경으로 짜여진 정당구조에서 서울이 치열한 각축장이 되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충청도가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의 말처럼 과연 「승냥이들의 승부처가 될 것인가」는 현지를 가봐야만 좀더 실감이 난다. 대전·충남지역 합동유세장 몇군데를 다녀보면 기존의 여야 선거운동 논리와 방법이 서서히 깨져가고 있음을 보게된다.
○내편 네편 없이 박수
아직도 영호남의 1노 2김 기반지역에서는 후보들이 그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거나 욕하는데 주저하고 있으나 대전의 분위기는 달랐다. 야당이나 무소속 후보들이 JP(김종필)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여당 후보라고 해서 「우리 JP」라고 죽자 사자 감싸지 않는다. 풍선은 약한쪽에서 터진다던가. 여하튼 13대 때의 지역감정 바람이 충청도에서 변조를 띠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일 오후,유성국민학교에서 열린 대전서­유성구 유세장. 민주당의 이희원 후보는 대뜸 JP를 고스톱판의 「광팔이」로 비유했다. 이어 국민당의 김태용 후보는 『곧 허리가 부러져 설자리가 없어질 지도자』라고 했고,무소속의 이재환 후보는 『계파 공천장사』라고 몰아붙였다.
청중석에선 제법 세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민자당의 박충순 후보가 자신이 김태용·이재환 후보를 제치고 JP의 낙점을 받았다고 자랑했지만 반응은 무덤덤 했다.
변한건 JP의 위상만 아니다. 유권자들은 이제 여야,네편 내편의 구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한 후보에 의해 동원된 청중처럼 보이는데도 다른후보의 그럴듯한 발언엔 서슴없이 박수를 친다. 대통령과 6공정부를 까는데는 일제히 박수가 터져나오고,야당의 부패·1노 3김의 정치행태를 꼬집으면 시원한 표정을 짓는다. 정주영씨를 「돈당」이라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끄덕인다.
연단의 후보들은 속맘을 알 수 없는 유권자들의 반응에 속이 타는듯 했다. 같은 대전고 동문인 4명의 선두그룹은 물고 물리는 인신공격을 가열시켰다. 배신자,거짓말쟁이,철새…. 청중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믿어지지 않고 누구말이 옳은지 모르겠어….』
단상 뒤에 있자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청중속을 파고들었다. 표는 그들이 던질테니까. 그러나 거기엔 깜짝 놀랄만한 변화의 메시지가 감지되었다.
전직 공무원이라는 50대 유권자.
『후보들의 말이 모두 맞아유. 지난 선거 때는 JP 얼굴만 보고 공화당 후보를 찍었어유. 그래야만 JP가 큰일 하는줄 알았어유. 그런데 그게 아니데유. 3당 통합인가,뭔가를 하더니 공천할때 보니 충남 사람을 자기 호주머니 공기돌 취급하데유. 이번엔 이것 저것 안가리고 인물보고 찍을래유.』
유세장에 네편 내편이 확연히 갈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세전 한후보의 실토가 새삼 떠오른다.
『민자당도 민주당도 싫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그렇다고 국민당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고요. 부동표가 50% 넘는다는 말 맞는 것 같아요. 후보자나 유권자 모두 이렇게 확신없는 선거를 해보기는 처음일거예요.』
현실불만,정치불신이 어떻게 분출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분위기에서 종래 여당의 안정논리,야당의 견제논리도 맥을 못추는듯 했다. 30대 회사원과 충남 대학생의 일치된 주장.
○안먹히는 여야 논리
『이제 여당만이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는 먹히질 않아요. 노태우 대통령과 민자당이 보여준 안정의 실체가 뭡니까. 경제가 이모양이고 민생치안이 곤두박질친 것도 안정입니까. 이나마 우리사회가 유지되는 것이 여당 때문인가요. 그런 안정이라면 누구도 할 수 있어요. 6공정부는 「안정」을 배신한 겁니다. 추악한 대권 싸움,TK 세상을 보고만 있으라구요.』
사업을 하는 40대 남자와 30대 주부는 야당에 대해서도 신랄했다.
『야당이 뭐 도덕적으로 나은게 있어야지요. 부패도,비리도 여당과 마찬가지죠. 공천한 것 좀 보세요. 정상배들이에요. 정부를 비판할때 박수는 치지요. 그러나 그들이 집권하면 더 나으리라는 신뢰는 주지못해요. 지역감정에 호소하면 만년 야당의 명맥은 유지할지 모르지만….』
유권자들의 소리에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절망,냉소 같은 것이 여과없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신생국민당이 반민자·반민주의 정서를 얼마나 메워줄 것인가.
『노대통령의 자질론,우리가 잘 몰랐던 청와대 주변의 부패 얘기는 정주영씨의 말이 그럴듯해요. 시원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현대의 부채가 9조원 이라는데 자기재산 3조원이면 대한민국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니…. 이건 코미디예요. 그분은 뒷 돈이나 대고 참신한 사람 밀어줬으면 태풍이 올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불만해소 기능 못해
선거판의 주역들은 온통 유권자들의 불만대상이다. 그렇다고 이번 선거가 우리사회에 가득찬 불만을 시원하게 연소시켜 주리라는 기대도 적다. 그 때문에 유권자들은 더욱 불만이다. 비틀거리는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통일문제를 전체의 고민으로 해결하려면 이번 선거가 연소기능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고 메시아를 기다릴 수도 없다. 찌꺼기를 태울 바람이 갑자기 불어닥칠 것 같지도 않다. 이상한 연기,이상한 불길이 불완전 연소로 끝나는 선거를 예고하는 것 같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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