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Billionaires] 월급쟁이에서 13억 달러의 사나이로

중앙일보

입력

포브스코리아삼성물산 직원으로 출발해 지금은 시가총액 100억 달러짜리 기업 카작무스의 주인이 된 차용규(50) 사장은 새로운 한국 부자의 모델이 될 만하다. 그가 이룬 성공의 배경에는 ‘자수성가’· '글로벌' ·‘금융’이란 요소가 있다.


지난 2005년 11월 2일 카자흐스탄의 대표적인 신문 ‘카즈프라브다’지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런던 주식시장에 카작무스(Kazakhmys)의 주식이 성공적으로 등록됐다는 것을 알고 몹시 기뻤다. 카작무스의 성공적인 상장은 카자흐스탄이 자원 개발을 위해 수천만 파운드의 투자를 유치한 것과 같다’고 전했다.”

‘카작무스’가 도대체 어떤 회사기에 영국 총리가 직접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일까.
현재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100억 달러쯤 된다. 지난해 매출 50억달러, 순이익 14억1,000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직원 수는 6만6,000명에 달한다. 한때 삼성물산이 위탁경영을 맡았으며 위탁경영이 끝난 2000년 당시 매출 7억 달러에서 7년 만에 무려 7배나 성장했다.

영국 총리까지 관심을 보인 카작무스를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차용규 사장이다. 1995년 차 사장이 합류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회사는 체납 임금과 만성적자에 허덕이는 콤비나트(기술적 연관이 있는 여러 생산부문이 가까이 있어 형성된 기업의 지역적 결합체 · 소련식 공단으로 볼 수 있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삼성물산 과장이었던 차씨는 카작무스 위탁경영을 위해 인수팀 16명과 함께 알마티로 날아왔다. 차 과장은 알마티 지점장 밑에서 총괄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90년대 초부터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 지사에서 비철금속 영업을 담당했었다.

삼성물산은 카작무스 위탁경영을 맡은 후 먼저 노후시설을 교체했다. 또 수천 대의 컴퓨터를 도입해 생산 · 조달 · 회계 시스템을 전산화했다. 발전소와 석탄 광산도 추가 인수해 구리 생산공정을 대규모 수직 계열화했다.

그 결과 카작무스는 당시 1t당 생산단가가 1,000달러 미만인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춘 동제련 업체로 거듭났다. 삼성이 카작무스 위탁경영을 위해 3년간 투자한 금액은 2억5,000만 달러에 달했다. 덕분에 카작무스는 완전 탈바꿈했다. 원자재 수급이 원활한 데다 생산 효율까지 갖추면서 경쟁력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95년 카작무스 위탁경영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하루는 러시아 마피아들이 AK 소총을 들고 차 과장이 일하던 사무실로 몰려와 다짜고짜 빌린 돈을 갚으라고 협박했다. 위탁경영 전 적자에 허덕이던 카작무스가 이 돈 저 돈 끌어들이던 중에 마피아 돈까지 쓰게 됐고, 마침 돈 많은 한국인이 위탁경영한다고 하자 마피아들이 돈을 갚으라고 들이닥친 것이다.

차 과장은 안경이 깨지고 얼굴이 찢기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한푼도 내주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 카자흐스탄 정부의 협조를 받아 마피아 측과의 협상을 타결지었다.

동료는 당시의 차 과장에 대해 “리스크가 많은 구리 선물거래 등을 자주 해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손해본 적도 있었다”며 “큰 거래를 두려워 하지 않는 두둑한 배짱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했다. 차 사장은 그 후에도 밤길을 다니다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실제로 알마티에선 목숨을 잃은 한국 비즈니스맨도 여럿 있다.

삼성물산이 카작무스 위탁경영을 맡긴 했지만 판로가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삼성물산의 네트워크가 가동됐지만 수년간 비철금속 영업을 담당해온 차 사장의 노하우가 큰 도움이 됐다. 차 사장은 90년대 초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 지사에서도 주로 러시아의 광물자원을 판매하는 일을 담당했었다.

차 사장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카자흐스탄의 구리를 영업했다. 품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있어 영업은 비교적 원활했다. 카작무스는 삼성물산이 외환위기 때문에 고전하던 95년부터 2000년까지 삼성물산 해외법인 이익의 45%를 차지할 만큼 효자 노릇을 했다.

차 사장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홍성혁 CIS컨설팅 사장은 그에 대해 “친화력이 있고 임기응변에 능한 스타일로 삼성물산 내에서도 판매통으로 평가됐다”고 기억했다. 영업능력을 발휘하면서 차 사장은 2년 뒤 삼성물산 카자흐스탄 지점장으로 승진한다. 승진과 함께 그는 사실상 카작무스의 책임자가 됐다.

이때부터 차 사장의 실력이 본격 발휘됐다. 한국은 외환위기로 기업마다 비상이었다. 카작무스 지분을 소유한 삼성물산도 자금난으로 지분매각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 사장은 “조금만 기다려준다면 꼭 성공시키겠다”고 본사를 계속 설득했다.

차 사장의 고집 때문에 삼성물산은 카작무스와 계약한 위탁경영 5년 기한을 채웠다. 삼성물산은 위탁경영이 끝나던 2000년 20%였던 지분을 45%로 오히려 늘렸다. 향후 전망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자흐스탄 정부에서 지분 매각을 요구했다. 이때 마침 삼성물산도 영국계 헤지펀드로부터 인수 ·합병(M&A)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삼성물산은 눈물을 머금고 2004년 카작무스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차 사장이 인생 최대의 도박을 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삼성그룹에서 원대복귀를 명했지만 그는 안정된 직장을 뒤로하고 모험을 감행했다. 삼성물산에서 넘긴 카작무스 지분을 크레디트스위스퍼스트뱅크(CSFB)를 통해 블라디미르 김이란 사람과 함께 인수한 것이다.

그는 함께 남은 이사(IR 담당)와 함께 런던 증시 상장을 주도했다. 상장과 동시에 약 15%의 카작무스 지분은 13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평가이익으로 변했다. 이 일로 인해 한국 언론에도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됐다.

▶카작무스의 구리광산이 있는 알마티 산맥.

그의 재산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2004년 약 12억6,000만 달러였던 매출액은 2005년에 약 26억 달러로 뛰었으며, 지난해 말에는 50억 달러로 늘어났다. 매년 100% 안팎의 성장률을 보인 것이다.

순이익 역시 3억 7,000만 달러(2004년)-5억5,000만 달러(2005년)-14억1,000만 달러(2006년)로 급증세다. 매출이나 순이익에서 성장률이 100%를 웃돌고 있어 주가는 앞으로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생산된 구리 대부분을 중국에 내다팔고 있는 카작무스는 중국의 공업화와 원자재 가격 인상 등 많은 호재를 안고 있다.

지난 2월 런던에 있는 그와 어렵게 통화를 했다. 차 사장은 전화 통화에서 “손에 쥔 돈도 없는데 부자란 평가 때문에 일하기 불편하다”며 “가족과 친지들,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전화를 걸어와 도와 달라고 하는 바람에 곤혹스럽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 전화 통화를 끝으로 지금까지 차 사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일체 거절하고 있다. 현재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차 사장은 1년에 한두 번씩 한국을 다녀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부자 리스트 상위권 중 상당수는 자수성가형이다. 한국의 상당수 재벌처럼 상속을 통해 부자 순위에 오르는 사례는 많지 않다. 차 사장은 21세기 한국형 부자의 새로운 모델로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물려받은 재산 없이 혼자 힘으로 부를 일궜다.

또 모험을 감수하며 해외로 나가 성공했다. 재일교포를 제외하고 해외에서 큰 부자가 된 몇 안 되는 사례일 것이다. 한국도 이제 국내에서만 활동해서는 큰 부자가 되기 힘든 시대가 됐다.

차 사장의 부는 주식 덕분이다. 금융시장의 도움없이 사업만으로 재벌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가 이룬 막대한 부에는 ‘자수성가’· '글로벌' ·‘금융’이란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요소가 포함돼 있다.

이석호 이코노미스트 기자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