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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탄생 백주맞아 귀국 삼남 이영근씨(일요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친일문학 불구 추모열의 감명”/아버지 훼절 거론땐 가슴 아파/말년 칩거 사릉에 기념관 건립
『대소간 역사에 관용한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일꾼보다 더욱 죄다.』
춘원 이광수가 47년 집필한 전기 『도산 안창호』에 실려있는 글이다.
민족사에 영광과 상처를 한몸에 남긴 춘원(1892∼1950) 탄생 1백주년을 맞아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일고 있다. 우리 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되는 『무정』등 원고 6만4천장 분량의 작품과 논설 등을 발표,문학사의 큰 획을 그으며 민족계몽에 주력,「문필보국」의 문호 춘원.
2·8독립선언서 기초에 이어진 상해에서의 독립운동,그리고 창씨개명,학병·징병권유 등에 앞장선 친일행적,6·25 납북사망등 춘원은 파란많은 우리의 근·현대사 한가운데를 살다 갔다.
춘원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친일부분을 「관용」해 괄호속에 묶고 문학을 살릴 것인가,그 실상을 규명하고 문학을 괄호쳐버릴 것인가,아니면 삶과 문학을 따로떼어 볼 것인가.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6·25도중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는 춘원의 유자녀 이영근(63·존스 홉킨스대 교수)·정란(59)·정화(57)씨등 3남매가 부친의 기념사업을 위해 함께 일시 귀국했다. 그들을 만나 영근씨로부터 아버지 춘원에 대해 들어보았다.
­오랜만에 세분이 함께 귀국한 소감은 어떻습니까.
▲착잡합니다. 학생들을 비롯,많은 사람들이 아버님의 친일등 훼절에 대해 거론하고,또 그러한 거론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저희로서는 몹시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분분했던 아버님의 사망을 중앙일보가 확인,보도하고(91년 7월26일) 제가 평양에 있는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왔을때 국내에서 보였던 추모열의와 또 지난 4일 열린 탄신 1백주년 기념강연회때 예상을 넘는 많은 분들이 참석,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버님을 잊지 않았다는데 감명도 받았습니다.
­기념사업을 위해 오신것으로 아는데 구체적 사업계획은요.
▲사회 각계의 원로들이 구성한 「춘원기념사업회」(회장 안병욱)와 함께 저희 힘닿는데까지 사업을 펼쳐나가겠습니다. 말년 사릉 근처 한 농가에 칩거하며 혹시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내 하는 이야기 좀 듣고나 가게』하시던 아버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선 아버님이 쓰신 글들을 모두 모아 좀더 완벽하고 훌륭하게 전집을 다시 간행,많은 분들이 볼 수 있게 하겠습니다.
또 그 농가를 개축,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해 예복등 유품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에 대한 연구가 좀더 심층적·총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연구논문이나 심포지엄등에도 지원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아버님의 행방을 어떻게 추적해 왔습니까.
▲6·25도중 3남매가 따로 따로 미국에 건너간 직후부터 아버님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스웨덴등 서방 대사관을 통해 생사를 확인하려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러던중 90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주석인 동포 작가 김학철옹으로부터 미국으로 편지가 왔더군요. 아버님의 행방을 알아봐달라는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55년 북경의 한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지요. 답신을 받은 직후인 7월 중국으로 가 확인한 결과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왔었어요.
­어떤 경로릍 통해 평양으로 가 아버님 묘소를 확인하고 돌아왔습니까.
▲북경·연변·목단강 시등을 헤매며 아버님의 행방을 찾다 못찾고 미국으로 돌아온 90년 12월께 북한으로부터 소식이 왔어요.
「아버지 산소 찾기 위해 중국을 헤맨 것이 하도 갸륵해 산소를 보여줄테니 평양으로 오라」는 「해외동포원호회」 명의의 초청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6월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지요.
­묘소를 보여준 북한 당국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버님 묘소옆에 역시 잘정리된 다른 납북인사 묘쇼 몇기가 더 있더군요. 안내원들이 제 카메라를 갖고 그 묘소들을 일일이 다 찍어주는 것을 보고 「우리들도 납북인사들을 잘모시고 있다」는 선전효과를 노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매일아침 안내원들이 찾아와 「서울에 가면 한반도 비핵지대를 설득하라」 「미국동포들을 설득,단체를 결성해 한국 비핵지대운동을 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면서도 고등학교 은사였던 현재 북한 최고물리학자 여철기 선생의 안부나 북한의 핵등에 대해 물어보면 입을 다무는 것이었어요. 아마도 핵물리학자인 저를 좀 이용해보려 하지나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밖의 평양에서의 이야기는요.
▲그 사람들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에요. 북한 방문소감을 쓰라는 거예요. 그래서 「해외동포원호회 여러분,아버지 산소를 찾게 평양에 초대해줘 대단히 감사하다」는 식으로 썼더니 한 간부가 대단히 화를 내더군요. 「위대하신 수령님,김일성」앞으로 쓰라는 그들의 공갈·강권에 정말 겁났습니다. 그래서 나도 공갈을 쳤지요. 『핵무기군축사찰 미국 정부자문위원이란 엄청난 직책과 미 시민권을 갖고 있는 내가 감히 북한을 조국으로 부를 수 없고 위대하신 수령님 운운할 수 없다』고요. 결국 안쓰고 말았지요.
­아버지 묘소를 찾았을때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11세에 고아가 돼 험난한 세상 사시다 이북에서 홀로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도 아버님은 수양이 많으신 분이어서 임종 당시에도 중생 생각하며 염불하셨을 것입니다.
­정신대 문제 등으로 일제에 의한 상흔이 다시 곪아 터지고 있습니다. 또 문화침투 등으로 일본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영속돼야 했던 민족의 자존·주체를 위해서도 친일 문제는 짚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 원로시인 미당 서정주도 자신의 친일을 시인,반성한다고 했는데 생이 좀더 이어졌다면 아버님도 그랬을까요.
▲『나는 민족 반역자의 죄명으로 법에 걸렸습니다/법관은 나를 꾸짖고 신문은 나를 욕설합니다/친지도 「왜 가만히 있지 않았느냐」합니다/아마 잘 하느라 한 것이 모두 잘못이었던 모양입니다./…/세상은 내가 「죽을 죄로 잘못했습니다. 나는 내 명리를 위하여서 민족을 반역했습니다」하는 참회만을 요구할 것입니다./그러나 나는 아무리 겸손을 꾸미더라도 그런 거짓말은 할 수 없습니다./…/나는 「우자의 효성」이라고 저를 평해 보았습니다.』
아버님이 말년에 남긴 시 『인과』중 한 부분입니다. 또 아버님은 저희에게 『동족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자식인 저희로서는 그 말씀을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조있는 아버님이셨고 또 스스로 어리석은 자는 될지 몰라도 민족에 대한 효성으로 그러하셨으니 「친일분자」로 불리는데 대한 불평도,참회도 없으셨을 것입니다.<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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