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지금이 어느 때인데 도청인가(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경찰이 전신전화국에서 국민당 울산지구당 사무실을 비롯,울산의 현대그룹 전 계열사를 대상으로 도청을 했다는 국민당의 주장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사회의 민주화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절감한다.
국민당의 주장이 맞는지,경찰의 해명대로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추적하기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선 명확히 가름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당국 스스로의 정확한 진상조사가 있어야 하겠으나 보도된 사실만으로 볼 때는 정치적 목적의 도청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정치적 도청이었는지 여부는 일단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이번 도청이 헌법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는 「통신의 비밀」보장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해당 경찰서장도 분명히 시인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만으로도 결코 가벼이 넘길 문제는 아니며 그 책임이 철저히 추궁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번 도청사건은 법적 차원에서도 중대한 문제이나 더 큰 문제는 이번 사건을 떠나서도 많은 국민들이 아직도 정보기관들에 의한 도청이 빈번히,그리고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화중 도청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갑작스런 잡음이나 소리의 변화를 감지한 경험들을 갖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시대에 있어선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부가 기회있을 때마다 「민주화」가 6공의 가장 큰 치적의 하나라고 자랑하고 있는 현시점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도청의 불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정부의 민주화 자랑을 밑바탕에서부터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우리는 김영삼 민자당대표조차도 지난 90년 4월 자신의 전화가 도청당했음을 암시하면서 「공작정치」의 근절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집권 여당의 대표조차도 그런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형편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이런 상황을 방치한채 어떻게 민주화의 진전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도청을 엄격히 금지하는 법률이 하루빨리 제정,공포되어야 한다. 여야는 지난 88년 우편 및 통신비밀보장에 관한 법을 의원입법으로 마련했었으나 그뒤 이런 저런 이유로 통과가 보류돼 13대 국회임기만료로 폐기될 위험에 처해 있다. 통신의 비밀에 대한 보장은 헌법에만 규정되어 있을뿐 그를 실천할 하위법이 없어 마치 머리만 있고 팔다리가 없는 상태다.
도청등 통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설사 범죄의 예방이나 수사를 위한 경우일지라도 법원의 허가가 있고 그것도 법이 정한 기간에만 가능하게 되어 있는게 선진국의 공통된 입법례다. 우리도 하루빨리 그를 따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결국 이 문제의 열쇠도 정부의 민주화의지에 달렸다고 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