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객관식 평가의 폐단/21세기 대비위한 긴급진단(벼랑에선 교육: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맞다­틀린다”흑백논리만 키운다/국교부터 「찍기」길들어 주관식엔 “주눅”/창의·사고력 부족,줏대없는 인간 양산
S대 국문과 2학년에 재학중인 박모군(21)은 대학입학후 처음 치른 1학년 중간고사때 논문식 시험경험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신소설과 역사·전기소설을 비교해 논하라」­.
책에서 공부한 내용이 머리에 떠 올랐으나 막상 문장격식에 맞게 풀어쓰려고 하니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30분 남짓 끙끙거리다 생각나는대로 간단 간단하게 몇마디를 기술할 수 밖에 없었다.
박군은 『주위 친구들이나 같은 과 학생들이 아직까지도 리포트작성이나 논문식 답안작성에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입학때까지 객관식 시험에만 길들여져 온 박군과 같은 이른바 「객관식 세대」들의 고충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덕성이나 정서의 발달은 뒷전이고 학업성취도만을 평가하되 그 방법은 거의 전적으로 사지선다 객관식시험만을 고집해온 우리교육­. 국민학교 월말고사에서부터 대학입시까지 우리교육평가의 유일한 잣대가 되다시피한 「객관식」은 크나큰 폐단과 해독을 우리 교육에 미쳐 위기의 한 구조적 요인이 되고 있다.
객관식평가체제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과다.
정답을 찾아나가는 방법과 과정은 따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
○방법과 과정은 무시
정답을 찾는 과정이 설사 독창적이라 해도 출제자가 요구하는 정답과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것으로 간주된다.
객관식 평가체제는 결국 학생들의 사고력과 창의력을 오히려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답이 없는 질문은 있을 수 없다는 사고방식과 모든 것은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양분된다는 이분법적 단순사고의 인간형을 양산해 왔다.
전문가들은 『객관적평가가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지 못하고 주체성없이 외부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동조형·순응형 인간을 만든다』는 지적도 한다.
이같은 사지선다형 객관식평가 일변도에 대해 그동안 끊임없이 우려의 소리가 있었으나 교육당국은 그때 그때 땜질식 처방으로 대처해 왔을뿐 여전히 객관식의 「골라잡기」식 평가로 우리교육의 병을 깊게만해 왔다.
우리나라에 사지선다형 객관식평가방법이 처음 선을 보인 것은 55년 중앙교육연수원이 미국에서 도입해 실시한 지능검사부터다.
이후 중·고등학교입시에서 부분적으로 객관식문항이 사용됐고 61년 서울대에서 전과목을 객관식으로 출제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지선다형 객관식문제가 우리의 입시와 교육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69년 대입제도가 예비고사+본고사로 양분되면서 예비고사는 1백% 객관식으로,본고사는 예비고사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단답형·완성형 등의 주관식문항으로 출제됐다.
그러나 80년 7·30교육개혁이후 81년부터 학력고사+내신성적으로 대입제도가 바뀌면서 다시 1백%객관식출제로 되돌아 갔다.
또다시 객관식일변도 시험에 대한 비난이 일자 교육당국은 이의 보완형식으로 86학년도부터 대학별 논술고사를 덧붙였다.
○지엽적인 지식측정
이후 다시 88학년도부터 입시제도가 선지원­후시험으로 변경되면서 논술고사를 없애는 대신 학력고사에 주관식 문항을 30% 반영해 현재까지 시행해오고 있다.
대입제도가 바뀔때마다 평가방법도 갈팡질팡해온 것이다.
물론 객관식이라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교육전문가들은 객관식도 문항을 잘만 개발하면 각분야에서 골고루 학력을 평가할 수 있고 주관식 못지 않게 이해력·사고력·창의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평가의 신뢰도가 높고 채점이 간편하며 시간과 경비가 절감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대입 객관식 출제는 30년이 다 돼가도 아직 지엽적인 지식이나 단순기억력을 측정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임인재 서울대교수(교육평가)는 『객관식이 지금과 같은 국가관리입시체제에서 다수인을 측정하는데 가장 편리한 출제방식이나 현재 출제하고 있는 대입문제는 깊은 사고력이 그다지 요구되지 않고 문제를 보지 않고도 답을 맞힐 수 있는 문제가 많이 출제됨으로써 모양만 갖췄을뿐 진정한 객관식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대학입시에서의 이같은 출제형식은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국민학교수업이나 평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입에서 1점이라도 더따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현실에서 대입출제경향이 그대로 하급학교에까지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정호 한국교육개발원 사회교과과정 연구원이 최근 각급학교에서 출제되고 있는 평가현황을 조사한 것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교에서 대입출제형식대로 시험문제를 내고 있었으며 출제된 문제의 상당수가 단순지식이나 암기·지엽적인 사실만을 묻고 있어 현 평가체제의 개선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업도 객관식 맞춰
예컨대 서울 K고교 국사과목의 경우 「고려말 성리학은 안향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관련되는 나라는? ①원 ②명 ③청 ④중」의 문제가 출제됐는데 이 경우 문제의 핵심이 분명치 않고 내용도 단순사실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어느나라에서 도입했는가 보다 왜 도입했으며 우리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등의 본질적인 면을 물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객관식 평가위주 출제방식은 학교수업운영에도 영향을 미쳐 대학입시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는 아예 그냥 넘어가거나 필요한 부분만 외우도록해 수업운영이 오로지 대입 출제경향에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복성 중앙고 교사는 『대입이라는 눈앞의 목표때문에 수업운영도 대입출제경향에 맞출 수 밖에 없다』면서 『객관식으로 출제되다보니 자연 수업도 객관식에 필요한 부분만 강의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교육전문가들은 단순히 몇개를 맞췄고 거기에 따라 서열을 매기는데만 의의가 있는 현재의 객관식위주 평가방식을 개선해야 우리교육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객관식이 갖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사고력과 논리력을 측정할 수 있는 문항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되 객관식 일변도의 현 평가체제를 주관식위주로 바꾸고 객관식은 주관식에서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또 현재 출제되고 있는 학력고사의 주관식문제도 엄밀히 따져 객관식이나 다름없는 만큼 논술형 주관식으로 출제하고 94학년도부터 시행되는 새대입제도인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이같은 주관식문제 비중을 높여 출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정재헌기자>
◎불 바칼로레아 필기시험은 모두 논문형/정기수 교수 공주대·불문학(전문가진단)
중등교육의 목표는 지식 취득과 동시에 학생들의 사고 능력과 표현 능력을 길러 주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험,특히 대입학력고사는 그러한 목표에 배치된다. 왜냐하면 미국제도인 이 객관식은 오직 주입식 암기교육만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교육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 대입제도 개혁의 근본은 설령 거기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현행의 사지선다식을 논술식 또는 논문식으로 바꾸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점에서 우리는 이제 미국시험방식의 편중에서 벗어나 유럽쪽으로 눈을 돌려 볼 필요가 있다.
특히 2백년 전통을 지닌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관심을 가질만하다. 부시 미대통령도 지난해 4월 교육개혁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 제도에 많은 관심을 나타낸바 있다.
바칼로레아 중등교육 과정을 마치고 치르는 시험이자 그 합격자에게 주는 국가학위로서 이것없이는 고등교육기관(대학은 그중의 일부분)에 진학할 수 없지만,이것만 있으면 어느 대학에도 등록할 수가 있다.
바칼로레아에는 일반·기술·직업의 세 계열이 있는데 일반 계열은 8개 부문,기술계열은 17개 부문을 포함한다.
바칼로레아는 시험은 필기·구두·체육으로 구성된다. 필시험과목은 부문별로 조금씩 다르며 6∼9 과목정도다. 프랑스어와 철학은 일반 및 기술 계열 25개 부문에 모두 공통이지만,예컨대 수학은 A2(어문학 부문)와 A3(문학·예술 부문)에서는 면제된다. 그 대신 A2는 제2외국어를,A3은 예술과목을 치르고,수학은 구두시험으로만 치른다. 제1외국어는 A1(문학·수학부문),A2,A3,B(경제·사회 과학부문)에서는 필기는 물론 구두 시험도 포함되지만 그밖의 21개 부문에서는 구두시험으로만 치른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과목이 부문별 특성에 따라 부과된다.
그뿐만 아니라 각 과목에는 부문별 중요성의 다소에 따라 가중치가 주어진다. 필기 시험에서 수험생은 과목마다 보통 세문제중 한 문제를 택하여 3∼4시간 동안에 5∼6페이지의 논문을 써낸다.
바칼로레아 시험은 6∼7월에 두그룹의 시험으로 나뉘어 실시된다. 첫째 그룹의 시험은 필기·구두·체육 시험으로 구성된다. 이때 20점 만점에 10점 이상이면 결정적으로 합격자가 되고,8점 이하이면 낙제,8∼9점이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둘째 그룹의 구두 시험에 응시한다. 그 결과 평균 성적이 10점 이상이면 합격자로 결정되지만,8∼9점을 받은 수험생들에 대해서는 중등 교육 필증(또는 졸업증)만을 준다.
시험 감독과 채점은 고등학교 교사들이 맡아하며,대학 교수들은 심사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는 외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교육이 입시 제도에 의하여 크게 좌우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직시하고 중등교육에 올바른 방향을 줄 수 있는 시험,특히 대입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우리 교육이 풀어야할 최대의 과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