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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남은 노 대통령에 바란다/길승흠 서울대교수·정치학(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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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차원 높은 민주화 힘쓸때”/혁신세력 목소리도 수용/정당간 정책대결 있어야
노태우 대통령은 지난 22일 취임 4돌을 즈음해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재임중 가장 보람있었던 일로 정치의 민주화,북방정책의 실현,어려운 경제의 극복등 세가지를 열거하면서 「정치의 민주화」에 관한 자신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는 6·29선언 이후,이 땅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어떤 때는 내자신 회의도 느꼈습니다. 기존의 사회질서는 흔들리고,고쳐야 할 것은 많고,국민들이 무정부상황에서 방황할 때 나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고,나의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비중커진 중산층
그러나 대가를 치러야 민주주의는 발전한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에게 이런 깨달음을 갖게하면서 민주주의를 성취한 것도 보람이겠지요.』
87년 6·29선언 이후 채택된 대통령직선제의 실시,1구1인제의 국회의원선거제의 실시,언론·출판·집회·결사등 국민기본권의 보장등 일련의 민주화조치,또 그 부작용으로 6·29선언이후 전개된 산업노동자들의 임금투쟁,부산 동의대 사건,강경대군 치사사건 및 정총리 폭력사건따위 때의 일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다.
과거 4·19학생의거와 10·26사태 이후 각기 「안정적 민주주의론」을 앞세우고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17비상계엄을 선포해 「권위주의적 과거」로 되돌아간 것과는 달리 6공정부는 6·29선언이후 유발된 각종의 정치·경제·사회불안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과거」로 돌아가지 않은 것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가리킨다.
한국역사의 틀을 가지고 보면 한국정치의 민주화는 6공정부의 특정세력 위주 용인정책,요즘 지상에 자주 보도되고 있는 「공작정치」「탄압정치」에도 불구하고 진일보한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진일보는 민주화·안정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중산층의 비중이 커진 때문이지만 6공정부의 역할도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정치의 민주화도 민주주의개념을 한 차원 올려 놓고 보아야 할때가 왔다고 본다. 현재 한국에서 21세기가 얼마나 자주 거론되고 있으며,또 이 「21세기」를 가리키는 전광판도 이미 등장한 판이다.
그렇다면 노대통령도 그러한 개념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비전은 두가지 모형을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일본모형이고,다른 하나는 구서독모형이다. 일본모형은 권위주의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고 정경유착형이지만 한국것에 비해 좀 앞선 것이기 때문에 일단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일본 모형은 집권 자민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독일을 모델로
자민당은 보수정담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정당 답지 않게 항상 참신한 「혁신정책」을 자주 수립,집행함으로써 국민의 특정그룹속에 나름대로 지지기반을 창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기집권해오고 있다.
50∼70년대의 농어민·중소기업인 위주의 정책,80년대의 도시민 위주의 정책,90년대 및 21세기에 국민중 25%를 차지할 고령층을 위한 「생활대국론」 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자민당은 「정책정당」의 면모를 갖추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의 집권민자당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6공의 민주화시대에도 이런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지지기반 창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3당합당시의 40∼50%의 지지기반을 잃어가다가 현재에는 20%대의 지지기반 위에 서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구서독모형은 어떠한가. 구서독은 한국과 같이 분단국가이면서도 모든 정치력들에게 합법성을 허용하고 있는 나라다.
구서독의 기민당정권(1949∼1969년)은 출범부터 사민당(59년까지 극좌정당인데도 불구하고)의 합법성을 인정하고,보수당답지 않게 사회복지정책을 수립하면서 사민당과 정책대결을 했다. 기민당의 이와 같은 사회복지정책은 물론 69년 집권한 사민당정권에 의해 더욱 확충되었다.
그 결과,오늘날의 독일은 기민당의 「능률」과 사민당의 「평등」정책이 적절하게 조화를 갖춘 나라가 되었으며 서민층의 불만을 극소화시킨 나라가 된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어떤가. 과거 1∼5공때와 같이 6공시절에도 한국의 보수정치인들은 혁신세가 진용을 조직해 「정당화」하려면 그들을 탄압하거나 그들에게 불리한 각종의 제도장치를 마련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는 「온건한」혁신정당조차 커갈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여야가 다 보수정당인 현재의 한국의 정치체제,거기에 최근에는 또하나의 재벌보수당이 급조,추가된 정당체제하에서는 성숙한 민주정치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지상에 별로 보도도 되지 않고 있는 힘없는 민중당을 제외한 나머지의 현재 정당들은 군소정당들을 포함해 모두 보수정당이다. 유권자들에게는 정책상 유사한 정당에 불과하다.
○인물중심의 폐해
따라서 현재의 한국의 정치체제하에서는 선거가 정당·정책 중심의 선거가 아니고 인물중심의 선거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한발 더 나아가 선거는 금권·관권·지역주의 등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제는 일본정도의,아니 독일수준의 민주화를 구상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그래야 정당이 뿌리내리게 되고,정치가 성숙해지고,민주주의가 발전할 것 아닌가.
노대통령은 기자간담회를 마무리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한 대통령」으로 인식되어지기를 바랐다. 잔여임기 1년간이지만 한차원 높은 민주주의개념을 정립하고 확산시키는 노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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