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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분쟁 일번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가다] 2. 분노와 절망의 땅 팔레스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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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은 맞붙어 있다시피 가깝다. 이 두 도시를 잇는 도로는 하나뿐이다. 이 도로의 베들레헴의 시 경계 입구엔 이스라엘군의 검문소가 있다. 도로 중앙에는 이스라엘군의 진지가 있고 도로 양측에도 무장 군인들이 경계를 선다. 베들레헴은 웨스트뱅크(요르단강 서안지역) 안에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지난달 30일 초병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기자는 여권을 보여주고 이곳을 통과했다. 그러나 베들레헴 주민인 살린 하나니(45)는 이 검문소를 지나 이스라엘 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허가증(타스리하)을 이스라엘군 당국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이 검문소는 불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니의 삶을 옥죄는 가난과 실업의 근원이기도 하다.

하나니는 2000년 12월 이후 실업자로 살아왔다. 그해 9월 시작된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로 베들레헴 관광이 중단되자 그가 일하던 '베들레헴 뉴 스토어'는 문을 닫았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팔던 이 가게는 지금도 문이 닫혀 있다.

1993년 하나니는 예루살렘의 전기회사에서 일하던 수리공이었다. 그러나 허가증이 없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직장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베들레헴에는 변변한 직장이 없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도시들이 그렇듯이 베들레헴 역시 공장 같은 생산 시설이라고는 거의 없다. 그저 조잡한 기념품을 만들며 근근이 버티는 영세업체 2백여개가 있을 뿐이다.

하나니는 간간이 생기는 사무실 청소로 한주에 1백셰켈(2만7천여원), 전기 수리업으로 건당 50셰켈의 푼돈을 받으며 생계를 이어간다. 전화는 요금을 내지 못해 오래 전에 끊겼고, 매달 2백셰켈의 전기요금도 석달 전부터 못 내고 있다. 방 두 개와 부엌 하나인 집의 월세는 올해 들어 아예 못 내고 있다. 집에 찾아가니 하나니 부부가 자는 안방은 거실 겸용이고 자녀 4명이 자는 방에는 공간이 부족해 침대가 3개뿐이다. 그래서 딸 미르나(16)와 모린(13)이 한 침대에서 잔다.

지난달 베들레헴대학의 입학원서를 들고 온 장남 리아스(18)에게 그는 "이제는 더 어떻게 해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대학의 한해 학비 1천달러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돈이다.

팔레스타인에는 수많은 하나니가 살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팔레스타인의 1인당 국민소득은 9백30달러였다. 지난해 말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 열에 여섯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야 했다. 실업률은 45%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올해 실업률이 70%이고,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빈곤층도 75%로 늘었다고 말하고 있다.

베들레헴의 모습은 통계치 그대로다. 시내 중심가의 상가와 호텔조차 오래 전에 문을 닫은 듯했다. 길가에는 너덜거리는 간판만 줄줄이 이어진다. 문을 연 것은 간간이 보이는 구멍가게 정도다. 신호등도 차선도 없는 도로에는 낡아빠진 차량들의 걸그렁거리는 엔진 소리만 요란하다. 남루한 차림으로 서너명씩 모여있는 젊은이들만 없으면 폐광촌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이들에게 가난과 실업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유일한 길은 더 잘 사는 이스라엘로 들어가 일자리를 찾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니처럼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웨스트뱅크를 벗어날 허가증조차 없다. 하나니는 "10년 후 이곳에 다시 와 보라. 유대인이 이 땅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며 "이스라엘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우리를 몰아내려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베들레헴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민간단체를 이끄는 주그비는 "이곳은 거대한 수용소"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테러를 이유로 주민들의 외부 출입을 통제하고 내부에서의 자급자족적 생존을 강요하면서 실업과 빈곤의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예언자 무하마드가 승천했다는 이슬람의 성지 아크사 모스크가 있지만, 허가증이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곳을 찾을 수 없다. 허가증이 없는 젊은이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아랍계 대학은 불가능한 꿈이다. 설사 돈이 있다 해도 세계 최고의 종합병원 중 하나인 예루살렘의 하데사 병원을 이용할 수 없다.

이동의 제한은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갈 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웨스트뱅크 내 라말라.툴캄.나블루스.칼킬리야 등 모든 팔레스타인 도시 주변과 주요 도로에는 어김없이 검문소가 설치돼 있다. 이 검문소들을 통과하려면 부지하세월이다. 기자가 지난 2일 라말라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방문한 뒤 도시를 빠져나올 때 검문소 한 곳을 지나기 위해 1시간10분을 택시 안에서 기다려야 했다.

베들레헴 주민인 대학생 라말(가명.20)은 2년 전 라말라의 뷔르제대학을 포기하고 베들레헴대학을 택했다. 베들레헴에서 라말라까지 최소한 검문소 두곳을 통과해야 한다. 그는 "검문소는 아무 예고도 없이 수시로 폐쇄된다"며 "아예 다른 도시로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가 보여준 하이파와 갈릴리 호수의 사진을 보며 신기해 했다. 이 팔레스타인 젊은이는 외국인인 기자가 가본 곳을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 제나(가명.50)는 지난달 미국에 사는 친척의 초청장과 함께 항공비까지 받아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녀는 미국에 가기 위해 요르단으로 가야 했다. 이스라엘 지역에 들어가는 허가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허가증이 있다 해도 그녀는 텔아비브의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곳에는 또 다른 특별 허가증이 필요하다. 결국 짜낸 방법이 국경 바깥의 암만 공항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절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절망은 테러를 낳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이어진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공보부의 한 간부는 "(이슬람을 상대로)이라크전을 강행했던 미국이 이스라엘의 비인도적인 정책에 눈감고 있는 것이 이 지역의 문제를 악화시키는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베들레헴=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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