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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중퇴가 야생화박사로-한국 야생화연구소 김태정 소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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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 야생화연구소의 김태정 소장(50)은 우리나라 야생식물연구의 독보적 존재로 꼽힌다.
지난 20년간 휴전선과 섬 지방을 포함해 남한의 모든 지역을 샅샅이 탐사해온 그의 머리 속에는 우리나라 풀·나무의 분포지역·서식상태·생장특성 등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찍어 소장하고 있는 컬러 슬라이드 필름 30만장에는 4천여종에 이르는 우리나라 풀·나무가 피우는 꽃의 거의 전부가 담겨있다.
그동안 『한국 야생화 도감』『약용식물』『고산식물(한라에서 백두까지)』『집에서 기르는 야생화』『여름에 피는 야생화』『약이 되는 야생초』『아스팔트 위에서 피는 야생초』등 10권의 저서를 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꽃 백가지』(90년 현암사간)로 제9회 과학기술 도서상 저술부문 상을 받은 지난 해에는 국립영화 제작소와 공동으로 「한국의 야생화」란 영화를 만들어 상영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는 또 대학교수, 중·고교교사 등 수많은 학자들이 모인 한국 야생화 연구회 회장이기도 하다.
85년엔 「한국산 야생 자원식물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교 중퇴 학력의 대중음악가였던 그는 30세 되던 72년부터 연구와 답사를 시작, 20년만에 당대 제일의 한국 꽃 전문가로 발돋움했다.
그가 한국 야생식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충남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세때 무작정상경, 고시공부를 하다 영양실조에 황달까지 겹쳐 치료불능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고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는 이웃 마을 촌부의 민간요법으로 치료 받은지 1주일만에 완쾌됐다.
이상한 향내가 나는 식물 열매를 빻아 그의 입과 코에 넣어 줄 때마다 노란 물이 몸에서 줄줄 흘러나오며 병세가 현저히 나아지더라는 것.
살아난 뒤에는 악단을 조직하고 레코드사에 입사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작곡가로 나섰다. 『눈물의 현해탄』『전선의 밤』등이 인기를 끌었고 롯데라면 감자깡 선전 등 CM송 작곡에 두각을 나타내며 영화음악에도 진출했다.
먹고 살만해지자 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살린 신비의 열매를 찾으러 나섰다.
30세 되던 72년께였다.
나무 열매인지 풀씨인지도 모른채 어렴풋한 모습과 향기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매면서 차츰 그는 우리 풀꽃·나무들의 아름다움과 고유한 특성들에 심취해갔다.
그러는 사이에 음악계에서 멀어졌고 작곡의뢰도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아 생활이 궁핍해져 갔다.
보다 못해 아내가 보따리 장수로 나섰으나 그는 한번 빠지면 미친듯이 몰두하는 성격대로 연구를 계속했다.
사진을 찍어두어야 꽃의 특징을 분명히 기록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77년에 들어서는 빚 갚을 돈으로 사진기부터 장만해버렸다.
사진기와 노트를 들고 전국의 산야를 헤매면서 차츰 식물연구에 전문적인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이때 그는 자신처럼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특용작물과 식용식물을 15년간 연구해온 친척 아저씨 한사람을 알게돼 의기충천했고 또 자원식물 전문학자인 송주택 선생을 알게된다.
전북대 생물학과 교수이며 자원식물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송선생은 아마추어인 그가 쌓아온 연구자료와 열성에 감탄해 그를 지도하며 함께 연구하게 된다.
송선생은 84년엔 그가 혼자 써본 논문을 보고 백방으로 노력해 결국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해준 은인이다.
이들 세 사람은 서울 낙원동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연구와 답사를 계속했지만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86년부터는 야생화 관련 원고를 여기저기에 기고하면서 그 고료로 사무실을 근근이 유지할 수 있었다.
남한 전역을 바둑판처럼 분할해 한번에 3∼7일씩 답사해나간 그는 휴전선 부근까지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금강초롱이 태백산까지 남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등 꽃의 서식현장에 대한 그의 기여는 크다.
87년 민통선 북방지역 학술조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했을 때는 분야별로 참가한 학자 50명중 유일하게 3개월에 걸쳐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전지역을 걸어 왕복했다.
90년엔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국 야생화 대 탐사단 단장으로 1년간 연인원 2천여명을 이끌고 8만km를 답사했다.
이때 중국을 경유해 백두산에도 들어가 43일간 산 속에서 살았다.
그는 우리 꽃을 대하는 인식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팬지나 글라디올러스는 알면서 우리 꽃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코스모스나 달맞이꽃이 우리 꽃이고 벚꽃은 일본 꽃인 줄로 다들 잘못 알고 있지요.
또 우리 국화 무궁화는 토착종이 아닙니다. 원산지는 하와이쪽이 아닌가 싶은데 수입종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지난해에 국화를 진달래에서 함박꽃나무로 바꿨습니다. 향기도 좋고 꽃도 아름다운 토착종이지요. 우리도 참고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혼해서 살아온 24년간 무려 30차례나 셋방을 전전한 그는 지금 서울 금호동 달동네에서 보증금 8백만원, 월세 30만원짜리 셋방에 살고 있지만 『좋은 집』이라고 말한다.
1백50종의 야생화를 10년 전부터 키우며 도시에서 적응시키는 연구를 해오고 있는 그에게 이 집의 4평짜리 화단이 특히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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