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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월요인터뷰

"인도주의는 북한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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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완상 총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61년 북한 유학생 남편과 생이별한 레나테 홍 할머니의 상봉문제와 남북관계, 북핵 문제, 대입 제도 문제 등 폭넓은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사진=김형수 기자]

만난 사람=이철희 정치부문 부장대우

요즘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수첩에는 일정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지난해 북한의 핵실험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2월에 재개되면서 이산가족 상봉과 대북지원 같은 적십자사의 인도주의 사업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총재를 만나 이산가족과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해결 방안과 대북지원 등 대한적십자사의 현안에 대한 구상을 들어 봤다. 30여 년 북한인 남편과 생이별한 독일인 레나테 홍 할머니 문제의 해결책도 물어봤다. 한 총재는 통일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폭넓은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지난해 7월 이후 중단됐던 이산가족 상봉과 면회소 공사가 지난달 재개됐다. 어떤 구상으로 향후 이산가족 등 인도적 문제를 풀어갈 생각인가.

"먼저 인도주의 사업은 정치.경제.군사적인 상황과 연계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남북 간 인도주의 사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이산가족 문제다. 하루에 열 분 이상의 이산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분단의 고통으로 말미암은 이들의 한을 하루빨리 해소시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나가겠다. "

-북측은 그런 입장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

"지난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남북 간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려면 '때문에' 논리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인도주의는 '불구하고'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한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는 식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걸 말했더니 공감하더라."

-한 총재가 지나치게 대북 유화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그런 시각이 있다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적십자 인도주의가 유화정책은 결코 아니다. 유화는 히틀러의 만행 앞에 굽실댔던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 같은 경우에나 해당되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건 평화라 할 수 있다. 부드러운 데서 평화를 만드는 참된 힘이 나온다. 인도주의는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이지 소극적인 현상유지나 양보정책이 아니다."

-정부도 적십자사와 같은 입장을 갖고 있어야 하나.

"아니다. 정부의 경우 대북정책에서 인도주의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건 인정한다. 당국은 탄력적인 상호주의도 해야 한다고 본다."

-적십자사가 북한의 인권 문제나 취약계층의 기아 등에 대해 비판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북한에 혹시 이런 메시지를 전할 용의는 없는가.

"적십자와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인도주의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독재국가의 인권에 문제가 있다면 앰네스티는 공론화해서 비판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식은 결과적으로 탄압받는 사람의 고통을 때때로 가중시킨다. 저도 유신체제에서 경험했지만 인권기구가 다녀간 뒤 잡혀가서 더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적십자는 공개적 비판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인권을 탄압하는 정부를 당황하게 해 피해가 가중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대처한다. 말로 비판하고 떠들어서 기본권이 신장된다면 얼마나 손쉽겠나."

-8차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대한적십자사와 정부가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어떤 전략을 마련했나.

"회담을 앞둔 상황이라 구체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기본 입장은 행방불명자인 납북자.국군포로의 생사 확인을 한 뒤 상봉 기회를 주고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북은 납북자.국군포로를 특수 이산가족으로 간주해 이산가족 상봉에 포함시켜 이 문제를 풀어 가려고 한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유연하게 나올 것을 기대한다."

-가족당 2시간씩 진행되는 남북 이산가족 화상상봉 형식으로는 반세기 넘은 한을 풀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금강산에서 직접 만나는 대면상봉만으로는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된 게 화상상봉이다. 그러나 역시 이산가족은 만나서 볼도 비비고 어루만져야 할 것 같더라.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가 내년 봄이면 완공된다. 그렇게 되면 1000명 수용 규모의 면회소에서 대면상봉의 기회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

-동독 유학생 출신 북한 남편과 1960년대 생이별을 한 독일 레나테 홍 할머니의 애달픈 사연이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총재께서 독일 적십자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고 해서 북한 당국이 생존 사실을 독일에 통보해 주는 성과도 있었다.

"6월 말 남북 적십자 간의 대북 의료지원 문제로 평양을 방문할 계획이다. 그때 이 문제를 북한 측에 물어볼 생각이다. 북한적십자회가 어떤 입장을 보일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 남편 홍옥근씨의 건강 문제 등을 알아보겠다. 또 레나테 홍 사례와 관련, 인도적 고통 해소의 중요성을 북측에 강조하고 싶다."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는가.

"문제는 해결 주체가 대한적십자사가 아니라 독일과 북한의 적십자사라는 점이다. 제가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다만 독일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오면 좋겠다. 자국민의 인도적 고통을 덜어주는 데 정부가 나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독일적십자사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금까지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대북지원 외에 남북 간의 인도주의 사업을 확대할 구상을 갖고 있는가.

"주로 남북 간에는 쌀.비료 지원이나 수해복구 같은 긴급 구호성 사업이 진행돼 왔다. 이제 좀 중.장기적 관점에서 사업을 확충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그중 하나는 북한의 보건환경 개선이다. 질병이나 사망률을 줄이는 것이다. 또 북한의 산을 푸르게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여 볼까 한다. 산이 헐벗은 게 바로 홍수나 농경지 유실로 인한 식량 부족의 한 원인이다."

-대북 녹화 사업은 어떻게 추진할 생각인가.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 분들이 고향 산을 푸르게 만드는 데 동참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려 한다. 또 기업 단위로 북한의 산 하나씩을 맡아 '1사 1산 푸르게 하기 운동'도 좋겠다. 6월 평양에서 남북적십자 간 합의서를 수정 보완할 수 있고, 또 이런 사업을 북한이 원한다면 중앙일보와 이 일을 추진하고 싶다."

-YS 정부 시절 초대 통일부총리를 지냈고 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같은 북핵 사태도 겪으셨다. 2.13 북핵 합의와 북.미 관계 개선 등 최근의 움직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사실 조심스럽다. 물론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북.미 간 수교가 이뤄지길 소망한다. 왜 소망만 하고 현실적 기대를 하지 못하는가 하는 걸 생각해 보자. 아직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는 근본적이라기보다는 전술적인 것 같다. 이게 향후 남북관계를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사인은 부시가 네오콘이면서도 대단히 현실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에서 실패한 만큼 다른 곳에서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하는 현실적 필요는 부시 행정부가 더 간절할 것이다."

-최근 '3불정책' 을 둘러싼 갈등이 심상치 않다. 교육부총리를 지냈고 대학에도 오래 몸담았던 입장에서 현재 대학입시 제도를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 교육의 기본 문제는 초.중등 과정 같은 보통교육 수준에선 세계적 경쟁력이 있지만 대학교육에 가면 곤두박질친다는 점이다. 세계 100대 대학 안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경쟁력이 없는데도 3불정책 같은 대입 문제가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인 것처럼 시비가 일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부모나 교사들은 서울대 입학이 우리 사회에서 계급적 위치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서울대 앞에 수십만 명이 한 줄 지어 서 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3불정책은 한 줄이 아니라 20줄, 30줄로 서라는 것이며 특화 등을 통해 대학 경쟁력 제고를 강조하는 것이다."

-꼬일 대로 꼬인 이 문제를 푸는 해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미국의 교육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최근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가 미국 대학의 위기를 언급하면서 입학에 초점을 두지 말고 대학 졸업생의 능력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 대학들도 3불정책이 옳다 그르다 하지 말고 참된 인재를 기르는 문제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대입(大入)'이 아니라 '대출'(大出) 정책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어느 대학에 입학했느냐에 으쓱할 게 아니라 이제는 세계와 국가와 민족과 시장이 필요로 하는 창의력 있는 인재를 대학이 길러내야 한다."

-한국 대학들이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인 것 같다.

"대학들이 안이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대립이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는 경고가 나온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이제는 복잡다단한 세상을 단순하게 좌.우 양분법적 시각으로 보거나 그 시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없게 된 21세기다. 그런데 아직도 좌.우 대결이나 진보.수구 대립 같은 판단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미 FTA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 사회의 진보를 자처해 왔던 세력이 FTA 반대 목소리를 주도하고 있는 양상이다.

"진보적이란 분들은 FTA를 비판하면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에 대한민국이 휩쓸리게 되면 생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세계화의 물결을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확실한 소신을 갖고 주도적으로 대처한다면 갈등이 점차 가라앉으리라 본다."

-이른바 대북 퍼주기 여론 때문에 대한적십자사의 회비 모금 실적이 부진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국민 여러분이 주시는 회비를 다 합하면 연간 420억원 정도가 된다. 그런데 그중 한 푼도 북한에 쌀이나 비료를 지원하는 데 쓰지 않았다. 비료 30만t은 1100억원인데 모두가 정부의 남북협력기금에서 나간다. 이것도 생존권적 기본권을 신장시키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소중한 것이다."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정리=이영종 기자 <yjlee@joongang.co.kr>

◆약력:충남 당진 출생 (71세)^서울대 사회학과^미국 에모리대 대학원 정치사회학 박사^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상지대 총장^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한성대 총장^노무현 대통령후보 사회담당 고문^대한적십자사 총재(현재)